[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2016년에 처음 홍콩여행을 했다. 20년 넘게 홍콩영화를 열심히 봐왔는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여행을 간다고 정보를 찾으니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지금의 홍콩에서는 1997년 이전의 분위기는 느낄 수 없다고. 실제로 대면했던 이든, 활자 너머로 만난 이든 같았다. 심지어 홍콩반환을 기억도 못할 거 같은 세대에게서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공항을 향했고, 비행에서는 당연히 <중경삼림>을 봤다. 첫 방문인 탓일까. 솔직히 아쉬운 게 없었다. 상상과 다른 건 구룡성채가 철거 됐다는 것뿐. 돌아오는 비행기 좌석에 앉아 <화양연화>를 틀었다. 그제야 반환 이전의 홍콩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2020년이 됐다. 16년 이후 홍콩에 간 적은 없지만 확실하게 느낀다. 홍콩보안법 이전과 이후는 다를 것이라고. 어느 여행자도 이전 분위기를 즐길 수는 없을 거라고. 그래서 지금의 홍콩. 앞으로의 홍콩을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상징적인 작품은 <중경삼림>이다. 유통기한 일만 년의 통조림을 만드는 데 과학자가 아닌 영화감독이 먼저 성공한 거 아닌가 믿고 싶을 정도로 홍콩의 정취를 담았다고 평가 받아서만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주고 받는 관계성이 <중경삼림>의 중요한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

그리고 57시간 후 나는 이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왕가위 영화에 꼭 등장하는 세 가지 소품이 있다. 비, 주크박스 그리고 시계다. <아비정전>은 시계와 장국영을 통해 개수작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마법을 선보인다. 사고(?)당사자인 수리진(장만옥)뿐 아니라 아비의 대사를 듣는 모든 이들은 1960년 4월 16일의 1분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중경삼림>도 다르지 않다. 경찰223 하지무(금성무)와 금발의 마약중개상(임청하)가 주인공인 첫 번째 에피소드는 1994년 4월 28일 밤 9시에 시작해 5월 1일 새벽 6시에 끝난다. 그 사이사이 누군지 모를 이의 시계가 등장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사건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화면 속 시간은 정방향으로 흐르지만, 내레이션은 역방향이다. 하지무와 마약중개상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하지무는 시장에서 범인을 쫓다가 금발의 여인과 부딪히는데 그 순간 1960년 4월 28일 밤 9시를 알리는 시계가 화면에 삽입되며 동시에 내레이션이 깔린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쳤던 순간에는 서로의 거리가 0.01cm 밖에 안 되었다. 그리고 57시간 후 나는 이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단골 패스트푸드점인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것은 물론이며 극에 등장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페이(왕페이)가 6시간 후 경찰663(양조위)과 사랑에 빠질 거라며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선후관계의 역전은 내레이션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경찰663과 페이의 산뜻하고 몽환적인 로맨스를 다룬 두 번째 에피소드 중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경찰663의 집에 몰래 숨어든 페이는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CD를 가져다 둔다. 경찰663은 바뀐 CD를 틀고는 전 여자친구가 좋아했던 음악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전 여자친구가 선물한 하얀색 곰인형에서 바뀐 노란색 고양이 인형을 보곤 ‘예전과 다르게, 지금 보니 귀엽군’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중경삼림>에서는 현재에 의해 과거의 사실과 취향도 바뀐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

지금 이 순간을, 가능한 오래 지속되었으면

아직 징조도 없는 일을 예측하는 운명적 자기실현. 미래의 사건이 과거의 기억을 바꾸는 일이 흔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거치며 두드러지는 건 현재다. ‘고정된 과거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90년대에 가장 많이 오마주 된 스텝프린팅 기법이 이때 활약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경찰663은 페이에게서 전 여자친구의 이별통보가 담긴 것으로 보이는 편지를 전해 받은 상태로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카운터에 기대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페이는 경찰663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딱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지만 포커스는 둘에게 고정되어 있고, 두 사람만의 찰나 같은 시간은 영원이 된다.

왕가위 영화의 오래된 테마는 고독이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소통의 불능으로 인연을 놓치고 마는 현대인을 다룬다. 하지만 <중경삼림>은 우연하게 시작된 운명적 만남을 필연으로 연결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왕가위 감독은 유일한 정식 인터뷰집 『왕가위: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에서 이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을 더하며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 장면에서 바깥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너무 빨리 움직여서 흐릿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찍은 이유는 저들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이고 초점은 두 사람에게 맞춰져 있기 떄문입니다. 그게 이 장면의 핵심이에요.(중략)영화에서 감독은 수 세기를 몇 초에 압축할 수도, 순간을 몇 시간으로 늘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끔 우리를 두고 시간 도둑이라 부르는 거고요. 살다 보면 우린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는 순간을 경험하죠. 그게 이 장면의 포인트예요-양조위와 왕페이는 지금 현재, 가능한 한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자신들만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죠”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

우연한 부딪힘 없이는 사랑에 빠질 수 없다

통조림은 저장기간을 가장 길게 늘릴 수 보관방법이지만 이 역시 영원하지는 않다. 라벨에도 주의사항이 명시되어 있다. ‘직사광선을 피하고 실온보관하시오.’ 1997년 아시아를 휩쓴 금융위기 이전. 누군가의 표현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청춘을 금성무, 양조위, 왕페이, 임청하가 낭비해주던 홍콩의 풍요와 낭만, 혼란을 매혹적으로 담은 <중경삼림>의 유통기한도 영원하지 않다. 주의사항과 달리 본토에서 똑바로 내리쬐는 시선으로 이미 홍콩의 거리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탓이다.

그래서 <중경삼림>을 둘러싼 모두의 기억은 천편일률적으로 통일되고 있다. 그 시절이 좋았지라는 푸념을 담은 ‘화양연화’로 말이다. 실은 <중경삼림>뿐 아니라 홍콩을 담은 왕가위의 모든 영화의 부제가 화양연화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왕가위는 프랑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반환 이후 홍콩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홍콩을 바꾸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비난했다.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야말로 홍콩의 유일한 정체성이라는 이유다.

모든 것이 변하는 홍콩에서는 현재의 사랑도 변하고, 과거도 변한다. 변화는 고통을 수반하지만 변화가 있어야만 오늘과 다른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다. 하나의 정체성을 주입하려는 시도는 변화를 멈추고 왕가위의 영화를 망치고 홍콩을 망친다. 왕가위 영화를 본 우리의 생각도 망친다. 왕가위의 영화를 지키고 싶다면 홍콩을 지켜야 한다. 두 사람의 거리가 0.01cm로 가까워지는 우연한 부딪힘 없이는 사랑에 빠질 수 없고, 우리의 <중경삼림>은 다시 시작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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