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초유의 방송 중단 사태를 부른 '한예슬 사태'가 배우 한예슬 씨의 사과와 촬영 복귀 방침이 전해지며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한예슬 씨가 촬영을 거부한 이후 대부분의 언론은 촬영장을 '무단이탈'한 그녀의 잘못을 나무라기에 바빴고, KBS와 제작사 역시 기민한 대응력으로 사태의 모든 책임을 한예슬 씨에게 돌렸다. 여론 역시 '지각이 잦았다', '결혼을 앞둔 계획된 행동이다' 등의 '카더라 통신'을 전파하며 한예슬 씨를 비난했다. 이처럼 '한예슬 사태'는 배우 개인의 인성과 책임감의 문제로 환원되며 한예슬 씨가 사과를 통해 용서를 구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배우 한예슬 개인의 일탈적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 한예슬 씨는 드라마 제작 환경과 관행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제기하며 촬영장을 벗어났다. 그 문제는 실제의 문제이고,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미디어스>는 3회에 걸쳐 '한예슬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달인데, 언제나처럼 우리는 손가락만 보고 소란을 떨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상을 받게 되면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요. 항상 어떤 현장에서든 많은 스태프 분들과 배우 분들이 큰 고생을 하고 계시는데, 그 스태프 분들의 고생이 조금 더 보람찬 고생이 되기 위해서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상황이나, 아니면 제작 시스템에 대해서 조금 더 개선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시청률로 평가를 받고 만족해야하는 현상이 아니라,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맡은 바 임무를 통해서 그걸 마음껏 할 수 있고, 그걸 통해서 만족하고 평가받을 수 있는 드라마 현장이 될 수 있도록 방송국과 제작사 측에서는 많은 노력과 개선을 부탁드리고요. 저 또한 맡은 바 임무인 연기를 마음껏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 문근영이 31일 오후 여의도 KBS에서 열린 '2010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여자 최우수상을 차지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배우 문근영이 2010년 말, K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직후 한 수상 소감이다. 자신이 가장 빛나는 자리, 빛나야할 자리에서 문근영 씨는 스타를 조명하나 정작 제 자신은 조명하지 못했던 스태프들을 상기한다. 최저임금에 준한 처우를 감내해야만 하는 그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촉구한다. 사람들은 그녀의 “개념 발언”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바뀌었나?

지난 2월 촉망받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죽음 또한 많은 이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영상 콘텐츠는 수많은 이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지지만 정작 그 과실은 소수에게 독점되고 다수는 착취당한다. 고 최고은 씨는 그와 같은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를 개선하고자 소위 “최고은 법”이 예고되었지만, 정병국 문화체육부 장관은 지난 6월 15일, 국회 문방위 전체회의에서 어디까지를 예술인으로 규정할 것인지 기준이 모호하고, 다른 노동자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법을 유보한다고 밝혔다. 사회적 파장에 비해 바뀐 것은 미약하다.

그리고 한예슬 씨가 문제다. 그녀는 연일 계속되는 밤샘 촬영의 강도 높은 노동환경을 거론하며 촬영을 보이콧했다. 드라마는 결방되었다. 톱스타의 유례없는 방송 보이콧에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한 마디씩 덧붙여 사건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런데 모양새가 이상하다. 몇몇 이들은 여전히 열악한 드라마 제작 환경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말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한예슬의 문제 제기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일리는 있다. 문근영 씨의 “개념 발언”과 고 최고은의 비극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하물며 톱스타 한예슬 씨가 말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정말로 한예슬 씨가 콘텐츠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실제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던 것인지 의심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의 진짜 의도는 무엇인지에 대해 설왕설래가 오간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2011년을 관통하는 세 에피소드는 모두 화려한 영상 콘텐츠 이면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공통분모로 갖는다. 일반적인 탐정이라면 이 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공통성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지엽적인 것은 걸러내 사건을 관통하는 핵심을 짚을 것이다. 그리하여 범인은 열악한 콘텐츠 노동 환경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한예슬 씨의 보이콧에서 후진적 콘텐츠 제작 노동 환경을 읽는 이들이 그와 같다. 하지만 비주류 탐정으로 비유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꿈을 해석하며 꿈들의 동일성이 아니라 꿈들의 차이에 주목하였다. “꿈의 공식적인 이야기에 의해 억압되었던 진정한 핵심을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 작은 변화들, 변주들, 생략들, 되풀이된 이야기들 사이의 불일치들이다.”(슬라보예 지젝(2002), 한보희 역(2008),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295쪽)

프로이트를 따라 앞서 나열한 세 에피소드의 표면에 나타난 공통성이 아니라, 그 이면의 차이들에 주목해보자. 문근영 씨의 경우, 그녀의 문제 제기는 “모범적”이었다. 그녀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작품을 완수했고 그 이후 문제를 제기했다. 콘텐츠 제작 중에 보이콧한 한예슬 씨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그녀의 발언이 소위 “개념 발언”으로 칭송받고 모두에게 박수를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비록 그녀의 지적이 한국 영상 콘텐츠 제작의 어두운 면을 겨누었을지라도- 어찌 되었든 간에 성과를 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다시 말해, 그녀의 “개념 탑재”와 “타의 모범”의 기본적 전제는 성과였다. 이것은 결과지상주의의 다른 판본처럼 보인다. 결과를 담보해야 지적도 하고 비판도 할 수 있지, 결과를 내지 못하는 지적과 비판은 공허하다는 암묵적인 동의 기제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개념”이며 누구의 “모범”인가? 대개 현재의 상황에서 이득을 얻는 자들은 결과가 크게 어그러지지 않는 한에서 비판을 수용(하는 척)한다. 정작 사태를 급진적으로 바꿀 비판에 대해서는 현실을 모른다고 쓴 소리를 내뱉기 일쑤이다. 문근영 씨의 진심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녀의 문제 제기는 현상을 유지하는 이들이 보기에 참으로 “모범적”이었다.

생활고 끝에 지병이 겹쳐 죽음에 이른 촉망받던 젊은 시나리오 작가 고 최고은 씨의 사례는 워낙 비극적이라 이견의 여지가 없겠다. 문제는 한예슬 씨의 경우다. 그녀의 문제 제기는 “모범적”이지 않았으며 “일탈적”이었다. 그리하여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치환된다.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는 한예슬 씨가 이미 높은 출연료를 받았다는 이야기다. 많은 돈을 받으니 그 만큼의 노동 강도를 감내해야 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둘째는 제작진과의 불화다. 왜 다른 이들은 묵묵히 고생을 감내하는데 유독 한예슬 씨만 이 문제를 지적하냐는 것이겠다. 셋째는 한예슬 씨가 문제를 제기하고부터 벌어진 이후의 해법 도출 과정이다. 한예슬 씨는 석고대죄를 요구받았다. 그녀는 조건 없는 백기 투항을 요구 받았고, 실제로 자신의 잘못을 완전히 시인한 후에야 사태가 봉합되었다. 그리하여 한예슬 씨의 문제 제기는 콘텐츠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 요구라는 앞서의 두 문제 제기와는 다른 이야기처럼, 그러니까 한예슬 씨의 개인적인 문제처럼 비춰지고 있다.

▲ KBS 드라마 촬영에 불참한 뒤 미국으로 떠난 배우 한예슬 씨가 출국 이틀만인 1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한예슬 씨의 경우에서 발견되는 이 세 개의 차이는 콘텐츠 노동 환경 개선 요구라는 문근영 씨와 고 최고은 씨의 사례와 별개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한예슬 씨의 경우에서 발견되는 이 세 차이야말로 영상 콘텐츠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필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우선 그녀가 높은 출연료를 받는다는 사실과 그에 맞는 합당한 노동을 해야 했었다는 이야기는 보편적 노동권과 노동의 개별성을 혼동하고 있다. 노동 환경 개선 문제는 노동하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의 문제다. 임금에 맞는 그녀만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 보편적 노동권을 무시하면서까지 그녀가 노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령 무상급식이 소득수준 상위 50%, 하위 50%를 가려 하위 50%에게 시혜적으로 베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듯, 노동 환경 개선 문제는 출연료나 임금의 고저를 떠나 모두가 누려야할 기본적인 노동자의 권리이다.

이렇게 보편적 요구로부터 한예슬 씨를 분리해내는 프레임은 결국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노-노 갈등으로 탈바꿈해 근본적인 문제를 은폐하는 방식중의 하나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 했던가? 보편권을 내세우는 이들을 다스리는 방법 중 하나는 보편성을 깨 그들 내부에 분란을 일으켜 단합을 막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이제이를 숱하게 목격해 왔다. 쌍용 자동차의 경우에서 보듯, 정리해고에 반대해 파업하는 노동자들에게 희망퇴직이란 미명하에 약간의 퇴직금을 더 얹어 노동자들을 투쟁의 대오에서 분리해내는 방법, 그 와중에 파업자와 희망퇴직자 사이에 분란을 일으켜 투쟁을 지리멸렬하게 하는 방법은 자본이 노동자를 통제하는 방법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제작 스태프들이 한예슬 씨가 평소 제작 과정 중 불성실했다고 하며 그녀를 비난하는 소란 속에는 함께 단합해야 하는 이들이 서로를 적대하는 슬픈 분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물론 좁게 보자면 자신들은 묵묵히 고통을 감내했는데 너는 왜 그러느냐는 힐난이 인지상정이긴 하다. 하지만 넓게 보면 과연 그러한 고통이 정당화될 수 있는 고통이었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끝으로 한예슬 씨로 하여금 자신의 지난 발언을 전적으로 부정하도록 만들고 그를 통해 완전한 백기를 받아낸 후에야 상황을 봉합하는 방식은 사태의 근본적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 이렇게까지 한예슬 씨를 몰아붙이는 것은 단지 감정적인 앙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일을 본보기로 삼아 다시는 그와 같은 “일탈”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생각건대, 이것이 어디 한예슬 씨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던가?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홍대 청소 노동자에게 홍대는 거액의 손해배상금 소송을 진행하고 있고, 구미 KEC지회 파업 참가자들에 대해서는 파업참가 정도에 따라 다른 옷을 입히며 반성문을 강요하고 있다. 유성기업의 파업참가자들에 대해서는 “나는 개다”를 복창하게 하며 인격적인 모멸감까지 안겨주었다. 그 모든 기저에는 반항하지 말라는 냉혹한 경고가 담겨 있다. 행여나 반항, 저항이 있을 시 강도 높은 처벌이 있음을 알리는 경고다.

정도를 달리하지만 한예슬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그녀가 단지 철없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모든 잘못이 전적으로 그녀로부터 나왔음을 모멸적으로 시인하라는 것 아닌가. 이것은 상생이 아니다. 겉으로는 팀워크를 강조하고, 그녀가 팀워크를 해쳤음을 강변하지만, 속으로는 결국 그녀가 단지 거대한 기계의 한 부품에 불과했음을, 팀워크란 실상은 상하주종 관계에 다름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럴 진대 어찌 노동 환경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인가. 한예슬 씨의 사과는 사태를 봉합하기는커녕 콘텐츠 제작 노동 환경에 자리 잡은 폭력적인 권력 기제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열악한 영상 콘텐츠 노동 환경으로 돌아오게 된다. 적절한 노동 환경을 만들라는 요구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열악한 노동 현실이 있고,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달라지길 바란다. 그런데 왜 현실은 지지부진한가? 어쩌면 또 다른, 그러면서도 상호 연관된 기제들이 노동 환경 개선이라는 근본적 숙제를 가로막는 것은 아닌가? 변화를 바라면서도 정작 근본적 변화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도 모르게 성과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어찌 되었든 꾸역꾸역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 속에 근본적 변화는 뒤로 제쳐두는 것은 아닌지,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는 돈을 더 많이 받는다는 이유로 시샘하고 그들은 내 편이 아니라고 각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못 견디겠다고 떠나겠다는 이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을 다시 제자리에 눌러 앉혀 함께 견뎌 보자며 지지 않아도 될 고통의 분담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상생이 아니라 서로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식의 극단적인 제로-섬 게임을 펼치고 있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비단 영상 콘텐츠 노동 환경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든 많은 노동 현장에서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사례를 목격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예슬 씨가 진짜로 영상 콘텐츠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총대를 멘 건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현재의 한국 노동 운동이 마주하고 있는 다양한 모순점들을 징후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스타나 영상 콘텐츠가 원래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수많은 사회적 욕망의 교차로이자 모순의 응축점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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