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는 방송 3사 가운데 시청률 1위로서 전통적 뉴스 강자지만, 시민사회로부터 받는 평가는 방송 3사 가운데 가장 싸늘한 상황입니다. KBS가 시민사회의 비판에 대해 ‘참여정부 시절에는 보수단체가 편향성 논란을 제기했다’며 귀를 닫고 있는 가운데, KBS 기자는 논란의 중심에 선 KBS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미디어스>는 익명의 KBS 기자로부터 직접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보다 자유롭고 신랄한 비평을 위하여 필자와의 협의를 거쳐 익명 형식으로 내보냅니다. ‘즐감’ 부탁드립니다!

KBS에서는 ‘KBS人’이라는 복합명사가 자주 쓰인다. 특히 사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무슨 공식적인 발언을 할 때 상투적으로 많이 사용한다. 주요 용례는 이러하다. “KBS인으로서 자긍심을 지켜야 한다.” “KBS인의 저력을 보여주자.” “KBS인으로서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자.” 등등. ‘삼성맨’, ‘현대맨’ 이런 단어와 비슷한 뉘앙스라고 보면 된다. 뭐,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쁜 단어는 아니다. 적어도 ‘KBS인’이라는 단어가 보다 높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담보할 때는 말이다.

하지만 기자라고 불리는 언론인으로 살다보면 헷갈릴 때가 많이 있다. 요컨대 중요한 질문은 이렇다. 나는 ‘KBS라는 직장에 다니는 조직원인가?’ 혹은 ‘시민의 알권리를 위해 복무하는 언론인인가?’ 원초적인 정체성 혼란이다. 물론 둘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헷갈린다.

▲ KBS 국정감사가 진행된 2009년 10월 12일, KBS비정규직 해고자들이 "해고는 곧 살인"이라며 강력히 항의하는 과정에서 이병순 당시 KBS 사장이 KBS 직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문방위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곽상아

메이저 언론사, 특히 지상파 방송사의 경우 직장을 옮기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히 드물다. 지상파 3사 모두 경력 기자 채용에 매우 인색할 뿐만 아니라, 모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 여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지상파 3사는 매우 폐쇄적인 기수 중심의 서열 문화가 안착했고, 이 서열 문화는 조직의 안정성을 크게 강화했다. 긍정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부정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더불어 조직에 대한 로열티도 다른 어떤 조직보다도 강하다. 다른 방송사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KBS는 그렇다.

우리들끼리는 “MBC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SBS 애들은 사기업이니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지.”라고 뒷담화를 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높였다. 물론 이런 뒷담화를 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스스로의 자긍심을 높이는 경쟁은 지극히 바람직하다. 게다가 직업적인 안정성 때문에 기자들은 보다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가지게 됐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 당시 이병순 사장과 함께 들어오던 KBS 전종철 기자가 타사 기자의 카메라를 막는 등 취재를 방해했다는 항의를 받자 "나는 KBS 기자이자 직원이다. 동업자끼리 이러지 맙시다"라고 말하고 있는 모습. ⓒ곽상아

요컨대 KBS에서는 그냥 ‘기자’보다는 ‘KBS 기자’를 우선하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다는 뜻이다. 그냥 ‘저널리즘’보다는 ‘KBS 저널리즘’이라는 단어가 앞선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 ‘KBS 기자’라는 단어에서 ‘기자’라는 단어가 사라질 때가 있다는 데 있다. 예컨대 사장이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하는 날이면 ‘KBS 기자들’이 나서서 의전을 한다. 사장님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다른 ‘기자’들의 취재를 방해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때 ‘KBS 기자들’은 그냥 ‘KBS 조직원’일 뿐이다. ‘기자’라는 정체성을 버린 거다. 중앙일보 기자들이 ‘회장님 힘내세요’라고 외친 사건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요즘 ‘나는 KBS 조직원이기 이전에 기자이다’라고 말하면 KBS 동료들은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KBS가 없으면 네가 있을 수 있겠냐?’라는 논리다. 최근 ‘도청 의혹’이 터지면서 KBS 내부에서는 이런 비난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직장인’ 혹은 ‘조직원’들만 남고 ‘언론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KBS 내부 게시판을 보면 ‘언론인’ 혹은 ‘기자’를 강조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에 살기가 느껴질 지경이다.

얼마 전에 노조에서 ‘도청 의혹’과 관련해서 사내 여론조사를 실시해 발표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해 KBS 내부 게시판에는 노조를 비난하는 여러 글들이 올라왔다. 현재 KBS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들이다. ‘우리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눈물겨운 선언들이다. 이 글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과연 ‘언론사’이기는 한 걸까? 라는 자괴감이 든다. 부끄럽지만 현재 KBS의 수준이다.

모 직원의 글을 먼저 보자. 이 사람은 ‘도청 의혹’으로 KBS가 위기에 빠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KBS를 나가라고 말한다. 이 용기의 배경은 무엇인지 참 궁금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도청의혹이 어떠하고? 우리 조직이 위기라느니? KBS인임이 부끄럽다느니? 이렇게 우리 조직이 부끄럽고 위기의식을 느끼시고 확신을 하시는 분들! 우리 조직 KBS에 무슨 그리도 미련이 많으신지요?

그렇다면 우리 KBS에 대한 미련일랑 단호히 버리시고 딴 살림을 차리시는 것은 어떠한지요? 위기 위기하시는 분들! 괜히 이사람 저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 옆에 계시다가 덤터기 쓰지 마시고 하루라도 빨리 보기 싫은 사람 떠나 살 길 찾으시는 것이 백번 현명한 일이 아닐까요? 이를테면 집 무너지기 전에 빨리 탈출하시어 살길 찾으시라 이 말씀입니다.

이분은 사장님이 아버지 같은 모양이다. 이런 글도 남겼다.

마치 어린애 같이 자기주장, 자기논리 인정해 주지 않는다라고 생떼를 쓰며 아무런 확증도 없이 우리 동생 도청했는데 우리 아버지 사과하지 않는다라고 우리 아버지 자격 없습니다라는 식의 비방을 동네방네 떠들어 대는? 그리고도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고 지고지순한 사회정의라고 주장하는 가당치도 않는 가식의 행동 또한 결단코 하시지 마라 이런 말씀입니다. 위기론자! 집 무너지기 전에 빨리 탈출하시지요?

전가의 보도는 두 가지다. 우리 가족은 우리가 지키자. 그리고 경찰이 수사하고 있으니 조용히 있어라.

■더 의문스럽고 미심쩍은 것은 지금 경찰 조사 중인 사안을 마치 우리 KBS가 분명히 도청을 하였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흥분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슨 연유에서 인가요? 그리고 말입니다. 소위 도청 의혹의 당사자는 다름 아닌 동료 기자가 아닌가요? 그런데도 왜 KBS본부노조는 아직까지 그 어떠한 확증도 없는 사안을 가지고서는 사장이 어떠하니, 보도본부장이 어떠하니? 반드시 책임을 져야 된다는 식의 아우성을 치는 이유는 또한 무슨 연유에서 인가요?

또 하나. 수신료 인상을 위해서 입 닥치고 조용히 있어라!

■수신료 인상 실패는 공영방송의 재정 위기를 부추기고, 제작 환경을 황폐화할 것이고, 우리의 생존 여건을 열악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은 이미 공지의 사실이 된지 오래다. 이 심각한 해사 행위, 공영방송 파괴 행위에 대해 이제 全사우들이 나서야 한다. 할 말을 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아니다’라고 말 해야 한다.

도청 의혹을 해소하지 않으면 KBS가 설 곳이 없다는 걱정은 철없는 아이들의 기우일 뿐이라는 것이다.

■생각의 자유야 좋다지만 일부 저 철없는 행동의 책임을 작금의 내가 짊어지게 생겼으니 환장할 노릇입니다.

결국 기자들의 선배라는 작자들이 단체로 성명을 내 ‘우리 좀 조용히 이 순간을 모면하자’고 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KBS는 이미 공개적으로 밝힌 바와 같이 경찰의 수사를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으며 경찰 수사에 적극 협조할 것이다. -보도본부 국장, 부장, 팀장 일동

KBS에 수신료는 종교에 가깝다. 광신도들의 통성기도는 계속 이어진다.

■마치 사측이 범죄집단인 것처럼 몰아가는 본부 노조의 이같은 행동은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렇게 해서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어떻게든 회사를 곤경에 몰아넣고 흔든다면 자신들에게 어떤 이득이 된다고 보는 것일까? 본부노조의 행동은 마치 자폭하자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모든 사원들의 숙원이었던 수신료 인상을 위해 모두가 하나되어 전력을 다할 때는 제대로 한 번 거들어 주지도 않다가 무언가 한 번 삐끗하는 것 같으니 마치 기회가 온 양 가열찬 공격을 해대는 본부노조의 행동은 참으로 무책임하고 과연 우리 조직인이 맞는가? 자문해보게 된다.

성숙한 자세로, 내 가족을 믿고, 단합된 마음으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가자는 (사실 ‘사람들이 잊어버릴 때까지 국으로 조용히 있자’는 말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선동이 21세기 대한민국 최고의 언론사라는 KBS에 판을 치고 있다.

■내 가족이 도둑질했다는 이웃의 의심의 눈초리만으로 내 가족을 믿지 않고 이웃과 동조하여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합심하여 위기에 대응하는 지혜를 모읍시다.

■지금 KBS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내분조장이 아니라 위기에 대응하는 지혜를 모으는 일이 아닐까요?

■진정 공영방송인 자존심으로 의연하게 수사 결과를 지켜보심이 어떠하실지요.

■시간이 지나면 명명백백 사실이 드러나는데 내부가 너무 혼란합니다. 성숙한 자세로 수사결과를 지켜봅시다.

■설문조사를 해서 KBS를 흔들고 있는 그대들은 도대체 어느 회사의 직원들입니까? 동료를 믿고 내가 속한 회사의 진정성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회사를 위하는 마음은 하나라고 봅니다. 그러나 좀 더 성숙한 자세로 화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내분 조장이아니라 우리의 단합된 힘을 보여 줄 때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조는 위기의 상황일 때 진정으로 KBS를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집안이나 직장이나 갈등이 심하고 화합이 되지않으면 잘 되는 꼴 본적이 없습니다. 집안일은 집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수신료 현실화를 앞두고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좋은 꺼리를 만났다고 박수를 칠지 모릅니다. KBS의 앞날을 위해서 직원 모두가 자중하고 빠른 시일 내 회사 안에서 해결책을 고대합니다.

눈물겨운 애사심이다. 이런 훌륭한 직원들이 있는 KBS가 왜 이렇게 망가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게시판에는 이런 댓글이 올라왔다. 이게 차라리 솔직한 말 아닌가.

■노조의 진정한 역할은 임금인상,근로조건개선,복지증진입니다!!!!

언론사 KBS가 아무리 망가지고 진창에서 뒹굴어도 수신료 올려서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것이 앞서 모든 말들의 행간에 숨은 진실이다. 우리는 과연 언론사로서 자격이 있는가? KBS가 과연 국민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부끄럽다. 한없이 부끄럽다.

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작동원리 가운데 하나는 프로페셔널리즘이다. 프로페셔널리즘의 핵심은 직업윤리다. 기자의 직업윤리는 ‘진실’이다. 조직에 대한 충성은 기자의 직업윤리 가운데 가장 아랫줄에 들어갈 만한 조항이다. ‘진실’만이 기자를 떳떳하게 만들고 ‘진실’만이 망가진 KBS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기자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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