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북한소재 영화에 대해 여성학자 정희진은 중요한 지적을 했다. ‘북한남성 판타지’가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남한의 깔끔한 이병헌과 북한의 투박한 송강호로 대비되던 경향을 벗어나 <공조>의 현빈, <용의자>의 공유,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김수현 등.

어느 순간부터 당대 최고의 미남들이 북한남성 역할을 맡고 있다. 이 남성들은 빛나는 외모 외에도 명석한 두뇌, 뛰어난 신체능력은 물론이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 동료에 대한 의리, 깊은 가족애 등으로 중무장한 완벽한 남성이다.

반면 그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남한 남성은 ‘상대적’으로 결핍된 부분이 존재한다. 충성심보다 먹고 살기 위해 공무를 집행한다거나, 가족은 해체 직전이거나, 외모가 상대적으로 돋보이지 않는다거나. 북한남성이 지닌 전통적 남성성은 화려한 액션과 결합해 여성관객을 흡수하고, 남한남성의 결핍은 극적 사건을 통해 극복되며 남성관객의 정서적 지지를 얻는다.

정리하자면 최근에 개봉한 북한소재의 영화들은 남북관계의 외피를 둘렀지만 실은 두 남자의 우정을 다룬 버디무비이거나 시각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캐릭터 무비가 본질이었고, 한반도 정세와 국제관계가 진지하게 등장할 여지는 없었다. 관객과 비평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은 양우석 감독의 전작인 <강철비>도 사실은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영화 '강철비2 : 정상회담' 포스터

한반도에 집중한 첫 번째 블록버스터

하지만 <강철비2>는 북한남성 판타지를 뛰어넘어 ‘한반도’에 집중한 첫 블록버스터로 기록될 만하다. 일단 배경을 설명해야 하는 초반부의 정보량이 다소 많지만, 지난 몇 년 간 실제 대한민국의 일간지의 1면 헤드라인과 지상파의 톱뉴스를 장식한 익숙한 내용들로 빠르게 전개되기 때문에 처지는 느낌 없이 현실성을 구축해나간다.

또한 정치적 발언 없이도 정치적 연예인이 된 타고난 반항아 정우성. (부당한) 공권력의 의인화에 최적화 된 무시무시한 배우 곽도원.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예민한 한국인을 무리 없이 소화한 유연석. 마지막으로 <쉬리> 최민식, <JSA> 송강호 이후 가장 인상깊고 설득력 있는 북한군을 연기한 이 영화의 眞주인공 신정근은 대체역사물의 뼈대를 튼튼히 구축한다.

<강철비2>의 가장 뛰어난 장점은 ‘정상회담’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듯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대표가 등장할 뿐 주요 등장인물 중 완벽하거나 결핍을 가진 인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스무트 대통령은 본인의 장기인 쇼 비즈니스를 통해 지지율을 끌어올리려 하고, 무소불위처럼 보이는 북한의 위원장도 강경파군부의 은근한 반대에 압박을 느끼며 어떻게든 활로를 뚫어보려 한다. 협상테이블에서 주체가 될 수 없는 남한 대통령은 자칫 무기력해질 수 있는 입지를 극복하고 정공법으로 양국을 중재할 수밖에 없다.

영화 '강철비2 : 정상회담'

노골적 희화와 특정 정치인 미화가 불편하다?

물론 이 과정에 대한 비판도 있다. 첫 번째는 특정인물의 노골적 재현을 통한 희화라는 시각이다. 특히 영화 중반부에서 핵잠수함 함장실에서 벌어지는 세 인물의 코미디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 코미디의 근간을 지탱한다. 국제 뉴스를 열심히 봤다면 스무트 대통령의 돌출행동, 입을 꾹 걸어 닫고 비협조로 일관하는 니코틴중독자 위원장의 태도가 맥락 없이 튀어나온 희화화는 아니라는 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적으로도 불필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블랙코미디가 관계의 비약을 통한 남성간의 우정까지는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갈등은 외교 주체간의 인간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수준에서 그쳐서 후반부의 전개를 신빙성 있게 그려내는 밑그림으로 충분히 작동한다.

두 번째 비판은 현 남한 대통령에 대한 미화라는 의견이다. 상징색부터 특정 정당의 정치인을 떠올리게 하는 탓이다. 그러나 한경재(정우성)의 행동은 영웅적인 면모가 돋보이기는커녕 누가 봐도 상식적인 무색무취한 인물이다. 일국의 지도자로서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하기보다, 너무나 교과서적인 대화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두 사람을 설득하려한다는 비판은 온당할지 모른다.

허나 협상이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중재자의 입지를 활용해 대화의 물꼬를 트는, 진영을 떠나 어떤 정치인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했을 법한 행동을 미화라고 한다면 한국정치를 과하게 폄훼하거나 더 나아가 정치혐오에 물들지 않은 건가, 스스로 점검을 해봐야하지 않을까. 실제로 보수진영의 정치인이 대통령이었을 시기에도 남한은 꾸준히 북한에 정상회담을 제안했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영화 '강철비2 : 정상회담'

평화체제 시뮬레이션을 완성하는 물음

여러 인터뷰에서 양우석 감독은 <강철비2>를 ‘평화체제의 시뮬레이션’으로 보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양 감독의 노림수는 작품 내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한 듯싶다. 북한을 타국으로 바라보기를 바라며 북한말 자막을 넣었다는 점도 시뮬레이션 같은 영화의 콘셉트와 어울리는 세심한 설정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시점에 평화체제 시나리오를 살펴봐야 할까. 냉전 종속 후 30년간 국제외교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가진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은 낮다. 본격화 된 미중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시점도 다가오고 있다. 한반도에 거주하는 8,000만 시민과 강대국의 패권까지 얽힌 대북관계에서 고려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무력충돌이 아닌 대화와 협력을 통한 평화체제로의 전환.

평화는 폭력 대신 대화로 우리 편의 강력한 지지와 반대파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유유자적한 신선놀음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정희진의 말을 빌리자면 ‘중단 없는 치열한 저항’ 상태다. 쿠키영상에서 한경재는 ‘국민 여러분은 통일을 원하냐’고 질문을 던진다. 사전적 의미의 통일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강철비2>는 남한의 정적, 속내를 알 수 없는 북한의 지도자와 강경파, 남북갈등을 자국의 이익으로 치환하려는 주변국의 비협조 속에서 국제정세를 다시 복기하게 만들고 진지하게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바라보며 평화체제와 그 이후를 고민한다. 판타지에 휩쓸리지 않고 중단 없는 치열한 저항을 지향하는 썩 괜찮은 상업영화로 평가하기에 무리가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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