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 첫 주말에 어머님께 다녀왔습니다. "우리는 휴가 같이 안 보내냐?"는 어머니 말씀은 자식들이 보고 싶다는 말씀이라 덥고 바쁜 휴가철에 어렵게 날짜를 잡았습니다. 날짜를 잡은 건 괜찮았는데 무더위를 생각하지 못해 2박 3일을 너무나 덥게 보냈습니다. 낮에는 낮이라고 무덥고 밤엔 복사열로 더워서 에어컨, 선풍기를 동원해도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공기 좋은 곳에서 살면 몸도 좋아진다고 말하지만 가만히 보면 우리 가족이 유난히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 합니다. 산속에서 살다보면 더위에 대한 느낌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한낮 무더위에도 집안이 더운 때 없고 불 때지 않으면 밤에도 쌀쌀해 이불을 끌어당기기 바빠서 며칠에 한 번씩 불을 넣어야 합니다.

이틀 밤을 제대로 못자고 더위에 시달리다 보니 빨리 산속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한여름에도 발이 시린 계곡에 온몸을 흠뻑 던져 무더위의 끈적함을 조금이라도 빨리 날려 보내고 싶었습니다. 점심 먹고 느지막이 출발하라는 어머니 말씀을 뒤로 하고 오전에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까워지면서 복병을 만났습니다. 조금씩 불던 바람이 세지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약하던 빗방울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게 내리다 말다를 반복했습니다. 어느새 무더위에 대한 생각은 모두 잊고 이 비를 뚫고 어떻게 집에 올라갈지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한 번 쏟아지고 말 소나기라면 잠시 기다리면 되겠지만 그럴 비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차가 갈 수 있는 계곡 다리까지 왔을 때 비가 잠시 소강상태였습니다. 몇 분만 참아주길 바라면서 빠른 걸음으로 올라오는 길 막바지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렇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거센 바람과 함께 숲속을 밤새 돌아다녔습니다. 순간적으로 내리는 비가 얼마나 많은지 계곡 물소리가 모든 소리를 삼켰습니다. 무이파의 북상은 이렇게 산중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아침부터 전화통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아랫마을에 사는 아는 분입니다. '계곡따라 난 찻길이 무너져 차가 다닐 수 없다'는 소식부터 전해졌습니다. 밤새 내린 비와 거센 바람에 집 주변은 괜찮은지, 윗집 혼자 사는 용길씨는 괜찮은지 둘러보았습니다. 땅콩 심은 밭에 토사가 몰려 땅콩이 좀 상하고 애지중지하던 돌복숭아나무가 부러진 것 말고는 피해가 없었습니다.

이젠 마을 밖을 용길씨와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아랫마을과 이어진 산길은 길 위로 물이 계속 흐르곤 있지만 길이 멀쩡했습니다. 하지만 아랫마을에서 산내로 이어진 길과 반선으로 가는 길은 계곡물에 휩쓸려 갔습니다. 평소에 계곡과 찻길은 높이차가 있어 물이 넘쳤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몇 개 마을이 태풍 무이파로 고립되었습니다. 다행히 전기와 전화는 고립되지 않아 텔레비전에 소식이 나간 뒤부터 우리집 전화는 끊이지 않고 울려댔습니다.

태풍 무이파는 길을 무너뜨려 마을을 고립시키기는 했지만 사람살이에서 관계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더운 한여름에 어머니를 찾아간 것도 부모 자식 관계에서 비롯한 것이고 먼 곳에서 안부를 묻는 것도 형제사이 관계고 싫든 좋든 직장에서 관계, 마을에서 이웃관계 등 삶에서 우리는 단 한순간도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한경쟁과 도시의 복잡함이 싫어 산속으로 떠나도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사람사이에 맺는 관계는 좀 단순해졌을지라도 자연과 맺는 관계는 새로 생겨납니다.

단 한순간도 관계를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음에도 관계 때문에 힘들어 하고 절망하는 것이 또 우리 삶이기도 합니다. 좋은 관계, 재미있는 관계만 맺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들 바람이겠지만 세상은 좋은 관계만 맺을 수 없음을 살수록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태풍 무이파가 아무 피해 없이 지나가면 좋고 피해를 주면 나쁘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태풍 무이파엔 선과 악이 없음을 누구나 압니다. 사람이 살면서 맺는 관계도 태풍 무이파와 같은 이치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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