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참 묘하다. 화수분이다. 전설처럼 저절로 귀한 것이 쏟아지지 않지만 공간을 만들면 무엇이든 나온다. 그 공간이 에너지를 주는 것인지 아니면 압박으로 작용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2006년 추석 즈음이었다. 후배 어머니가 내준 6평짜리 2층 건물에 본격적으로 토마토 공간을 만들었다. 2층 방에 있던 장롱 한 짝을 부숴 책상을 만들었다. 벽에 잇대어 둘러놓고 시장에 가서 천을 끊어다 씌었더니 제법 그럴듯하다. 세 사람이 앉으니 딱 맞았다. 정감어린 나무 여닫이문을 열면 이웃집 마당과 다른 집 옥상이 보였다. 손바닥만 한 창문을 열면 보문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그렇게 만든 공간에 컴퓨터와 프린터를 갖추니 당장이라도 훌륭한 잡지를 마구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잡지 창간 계획을 세울 때 만났던 수많은 사람에게서 들은 부정적 예측은 마음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그렇게 부푼 가슴을 끌어안은 채 추석을 맞아 고향에 갔다. 아직도 그날 월간 토마토 사옥 문을 잠그며 골목길에서 헤어질 때 보았던 후배들의 표정이 머릿속에 생생하다.

편집디자이너 영입 실패

월간 토마토에 글쟁이 셋은 모였으나 가장 큰 문제는 ‘편집기자’ 확충이었다. 자본금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정당한 급여를 제시하며 공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음알음 편집디자이너를 소개 받았다.

“안녕하세요! 인구 150만 도시에 문화예술 잡지 하나 없는 것에 답답해하던 젊은 친구 셋이 모였습니다. 잡지를 매개로 즐거운 세상 만들기에 동참하실 생각 없으신가요? 급여는 약속할 수 없습니다. 성심성의껏 가능한 범위에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만들어간다는 생각으로 해주실 수 없는지요?”

대략 이정도 내용으로 설득하려 했다. 많은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니다. 그나마 만나준 사람은 정말 고마운 축에 속한다.

“정말 대단한 계획을 세우셨네요. 꼭 성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제 상황이 결합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겠네요.”

한 달, 두 달 시간만 흐르고 도무지 함께 할 편집디자이너는 구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을 게다. 급여를 포함한 근무조건 중 아무것도 확답을 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사실 사업계획을 작성하는 단계에서는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세상에 꿈꾸는 자, 어디 한 둘이겠는가? 그들 중 한 명 만나는 것은 쉬울 거라 생각했다. 현실은 달랐다. 정말 어려웠다.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여기까지 와서 편집디자이너를 구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포기할 수는 없다. 이수정 기자가 편집을 맡는 수밖에….”

이런 제안이 가능했던 것은 그녀가 대학교 학보사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보사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라 취재기자 편집기자 구분이 쉽지 않았고 덕분에 눈감 땡감 글도 쓰고 편집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친 김에 사진촬영 담당도 선임했다. 점필정 기자다. 막 사진 촬영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터였다.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후 ‘토마토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사풍(社風)이 되기 때문이다.

▲ 토마토 창간 준비호 표지
토마토를 제호로 삼다

남은 문제는 제호 확정이었다. 창간 5년 차를 맞는 지금도 여전히 왜 잡지 이름이 ‘토마토’여야 하는지를 묻는다. 창간회의를 진행하는 동안에 큰 틀은 결정했다. 잡지 제호는 ‘과일 이름으로 하자!’였다. 콘텐츠를 구체화하지 않았을 때였지만 무엇인가 ‘톡톡 튀는 상큼함’이 묻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량감도 있고 흐뭇하면서 향도 짙고 특별한 맛이 강렬한, 그런 느낌의 잡지를 상상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과일이름을 후보작으로 모두 거론했다. 사과, 파인애플, 레몬, 오렌지, 바나나, 수박, 감 등등.

그중 토마토는 가장 먼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이름이다. 너무 흔하다는 이유로 보류했다. 대신 ‘레몬’에 꽂혔다. 그냥은 좀 밍밍해서 ‘레몬가게’라는 이름을 결정했다. 그 후 시장조사 차원에서 서점에 들렀다가 ‘레몬트리’라는 잡지를 본다.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역시 세상에 좋은 자리는 많이 남지 않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처음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토마토’를 제호로 확정했다.

“괜히, 많이 쓰겠어. 그만큼 좋으니까…. 입에 착착 붙잖아. 부르기 쉽고 몸에도 좋고.”

제호 결정 스토리치고는 조금 싱거운 것 인정한다. 그래서일까? 제호를 들은 이들 중에는 영문 철자를 활용해 풀 네임을 만들어보려는 적극적인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대전 오브 매거진….’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한 번 만들어 볼 생각이다. 또 직업체험을 위해 사무실을 찾은 초등학교 학생 중에는 “아저씨,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라 채소예요.”라며 딱 부러진 문제제기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시라. 토마토가 과일인지 채소인지를 묻는 질문이 수십 개다. 자세한 내막을 이곳에 주저리주저리 쓸 필요는 없을 게다. 결론은 토마토가 과일이라고 얘기해도 전혀 문제는 아니다. 그렇게 뚜렷하게 구별할 필요가 무엇일까? 관세 문제와 관련해 1887년 토마토를 채소로 규정한 미국 법원 판례가 있지만 그걸 꼭 따를 필요야…

준비호 배포 금지!

사무실과 기자재를 갖추고 제호까지 확정했으니 남은 것은 콘텐츠 기획이다. 우선, ‘창간 준비호’를 먼저 만들어보기로 했다. 제작비용이 부담스러웠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 판단했다.

창간 준비호는 11월 쯤 내는 것으로 예정했다. 2007년 1월 창간호를 내기로 결정하고 2006년 10월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술술 진행할 것 같던 일정이 미뤄지기 시작했다.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80P 내외 분량의 콘텐츠를 채우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도 차별성 있는 콘텐츠로 말이다. 조금 다른 ‘무엇’에 집중하면서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여실이 깨달았다.

다른 이유를 굳이 찾자면, ‘아르바이트’다. 세 명의 주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준비자금은 인쇄비였다. 인건비까지 투자할 여력은 없었다. 글 쓰고 사진 찍는 일을 중심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저녁에 모여 토마토를 준비하니 마치 ‘동아리’ 같았다. 긴장감은 살짝 떨어졌지만 재미는 쏠쏠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다.

늦어진 창간 준비호 발행은 결국 3월에야 이루어졌다. 독자에게 발송할 정식 책자는 아니었지만 설레기는 매한가지였다. 딱 300권을 인쇄했다. 예비독자와 출발을 함께 한 이들에게 배포할 계획이었다. 설레는 마음도 잠깐, “우리 이 준비호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철통 보안을 유지하자.”

덕분에 지금 월간 토마토 창간 준비호를 발견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당시에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우리가 잡지를 만들 수 있을지 심각하게 의심했다. 실제로 후배들 일자리를 혼자서 고민하기도 했다. 그렇게 침통함으로 며칠을 보내면서 무엇이 문제인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먼저 시사 잡지를 창간했다가 6개월 만에 문 닫은 경험이 있는 오투컴 장병문 실장 도움이 정말 컸다. 그는 편집 디자이너다. 그 좁은 사무실에 직접 방문해, 음료수도 사왔다, 잡지 편집에 대한 기본과 잡지사 운영에 대한 경험담을 전수해 주었다.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그 지점이 ‘희망’이었다.

대전광역시에 <월간 토마토>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만 4년을 넘어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금을 만들어내려 했던 연금술사처럼 ‘뭉클한 감동’에 중독돼 계속 실험을 반복하며 주위를 괴롭힙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월간지를 만들면 한 달 중 열흘은 빈둥빈둥 놀아도 되는 줄 알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는 월간지를 만들려면 한 달을 60일처럼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설픈 도전을 계속하며 히말라야라도 오르는 사람처럼 결기에 차 있다가도 고집불통 철딱서니가 아닌가 싶어 은근 뒤통수가 간지럽기도 합니다.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잡지 만들기는 여전히 태풍에 휘둘리고 표류하며 여행 중입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우리끼리 치열한 그 여행을 가볍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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