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정인숙 칼럼]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PD사망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가 올해 3월부터 3개월여에 걸쳐 현장조사와 자료 검토, 비정규직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설문조사, 면접조사, 서면조사 등 다각적인 조사활동을 거친 결과를 발표하였다. 결론은 이렇다. “이재학 PD는 고용의 형식과 관계없이 청주방송의 노동자였고, 동료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부당한 해고를 당했다”(진상조사보고서 12쪽)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진상조사위가 밝히고자 한 ‘노동자였음에 대한 증명’의 노력들이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근로기준법 제2조 1항에서는 근로자의 정의를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자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지만, 방송노동계의 현실은 14년간 임금을 받고 회사를 위해 일한 노동자가 ‘노동자임’을 ‘노동자였음’을 증명하고 법리다툼을 해야 할 만큼 부조리하다.

KBS 화면 자료

자명하게 인식될 것처럼 보이는 노동자의 지위가 법으로 ‘노동자성’을 다퉈야 하는 관계라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노사관계이며 그 자체로 최악의 노동여건임을 말해준다. 노동은 했으나 노동자는 아니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가장 극심한 노동소외를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노동의 생산물에서 소외되고, 노동과정에서 소외되고, 영장류인 인간의 유적(類的) 존재에서 소외되고, 인간관계에서 소외된다는 4가지의 노동소외를 설명했다. ‘노동자성’이라는 이 인정머리 없는 법개념의 증명은 어쩌면 그보다 더 가혹한 노동소외일지도 모른다. 부당하게 행해지는 노동조건을 감내하면서 노동을 했음에도 노동자임을 법으로 다퉈야 하는 방송노동계의 현실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보고서는 ‘방송계 노동자성’의 판단기준으로 다섯 건의 대법원 및 하급심 판결사례를 제시하였다. 판례들의 결론은 “근로기준법상의 노동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계약의 형식보다는 그 실질성에 있어 노동자가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였는지 여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프리랜서가 많은 방송노동현장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법원은 여러 판결을 통해 방송제작현장의 프리랜서들에게도 일반적인 노동자성 판단기준을 적용해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정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고 이재학PD는 명백히 청주방송의 노동자였다는 논리적인 결론에 이르고 있다.

종속적인 관계의 증명이라는 복잡한 법 논리를 떠나서 그는 14년 이상 임금을 받고 근무한 전문 연출자였는데, 그와 같은 명백한 현실이 존재함에도 ‘노동자성’을 증명해내야 하는 방송계의 노동현실은 언제쯤 개선될 것인가. 보고서는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청주방송에서 벌어졌던 문제는 청주방송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러 방송사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이다”(227쪽)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방송계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성’의 입증을 위해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법리 다툼이 이어질 것인가. 정부는 미디어산업과 콘텐츠산업의 장밋빛 미래를 논하기 전에 사업자의 ‘사업자성’을 제대로 감독하고 책임을 묻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짧은 기간 동안 다양한 조사방법을 통해 방송계의 노동환경과 비정규직 문제를 드러낸 진상조사위원회의 활동과 깊이 있는 보고서의 내용에 경의를 표한다.

* 정인숙 가천대 교수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언론인권통신' 제 866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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