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처음 '여보'라는 말을 하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다. 저기요, 있잖아요. 결혼하고도 한참을 그렇게 불렀었지만 '여보, 당신'이 오래된 냉장고처럼 익숙하다 못해 권태로운 일상이 된 시절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졸혼'이라는 단어가 주변에서 들린다. 아이들도 있고 이제 와 이혼이라 하기도 그러니, 결혼을 ‘졸업’하겠다는 것이다.

tvN 새 월화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의 어머니 진숙(원미경 분)이 그 졸혼이란 말을 꺼내는데 가슴이 미어졌다. 살면서 이혼은커녕 졸혼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도, 진숙이 목이 메어 졸혼을 하자는데 그녀가 살아왔던 삶의 무게가 온전히 다가왔다.

진숙 씨하고 부르던 남편 상식(정진영 분)이 어느덧 ‘어이, 저기’ 하다 ‘은주야, 은희야, 지우야’ 하며 아이들 이름으로 아내를 부른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을 보고 말하는 게 싫어 아이들 방문을 열고 아빠 식사하시라고 시킨다. 아내를 보며 설레던 남편이었는데, 이제는 아내가 말만 시키면 '가자미 눈'을 뜨고 바라본다.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을 내팽개치기 십상. 시간의 힘이다. 세 아이를 낳고 키우며 살아온 세월이 무릎 꿇고 반지를 전해주던 그 설레던 커플로 하여금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내 진숙은 '졸혼'을 요구했다.

졸혼을 선언한 아내

tvN 새 월화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아내의 졸혼 요구에 남편은 뜨던 부항을 집어 던졌다. 집을 팔아 나누자는 말에 화를 버럭 낸다. 그리곤 맘대로 하라더니 늘 가던 산으로 휭하니 떠나버렸다. 아이들은 제각각이다. 똑부러지는 맏딸은 평생 집안 살림만 하는 엄마가 어떻게 혼자 살려고 하냐며 현실적인 질문으로 진숙의 의지를 꺾으려 한다. 뭐든 엄마 맘대로 하라는 작은딸이지만, 그 말이 진숙의 복잡한 속내를 덜어주지는 않는다. 아직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 못한 막내아들은 자신은 독립할 수 없다며 현실적인 이유를 들며 발목을 잡는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진숙은 '독립'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산행 갔던 남편이 행방불명되더니, 머리를 다친 채 돌아왔다. 지나온 세월을 다 잊은 채, 22살 그녀만 보면 설레던 젊은 상식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가족입니다>의 1, 2회는 기억상실이 된 아버지에게 발목이 잡혀버린 엄마의 졸혼 전선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평범한 가족, 이 말이 맞을 것이다. 숙이씨만 불러도 설레던 그 젊은 상식은 온데간데없고 가부장적인 고집불통이 되어버린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비위 맞추랴 아이들 키우랴, 자신을 내세워 본 적 없이 늙어버린 어머니. 그리고 남매라지만 만나면 늘 아웅다웅, 제각각 삶의 스타일 때문에 엇나가기 십상인 가족. 말이 가족이지 서로의 속사정은 뒤춤에 찔러둔 채 살아가는, 그래서 때로는 남들보다 서로를 더 이해하기가 힘든, 아니 이해하기가 싫은 관계. 이게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 아닐까.

22살이 된 아버지

tvN 새 월화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접속>을 비롯하여 <텔 미 썸딩>, <후 아 유>, <황진이> 등의 각본을 써왔던 김은정 작가가 <우리 집에 사는 남자(2016)> 이후 오랜만에 돌아왔다. 전작과는 다르게 우리네 사람 사는 모습을 물씬 풍기는 '가족' 이야기로 돌아온 김은정 작가는 졸혼 위기를 맞이한 노년 초입의 부부에 초점을 맞춘다. 거기에 자존심이 세지만 오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한 채 각방을 쓰며 살아가는 큰딸 부부와, 오래 사귀던 연인의 바람으로 지난 5년간 연애 한번 하지 않고 지내온 둘째 딸의 이제 새롭게 시작된 사랑 이야기가 엇물리며 엮인다. 자신들의 삶도 버거운데 거기에 빨간 불을 켜며 가족의 이름으로 소환되는 일들에 아들과 딸들은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그래도 '가족'이라 달려간다.

정진영, 원미경, 추자현, 한예리 등 그 누구 하나 빠지는 이 없이 어우러지는 호연과 함께, 모처럼 진지하게 몰입할 수 있는 가족 드라마의 등장이다. 막장 아니면 가족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을 것 같은 시절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가족 이야기를 통해 모처럼 가족에 대한 진솔한 질문을 던져 보게 만든다.

젊은 상식이 아내에게 “숙이씨” 할 때마다 흠칫하는 늙은 숙이 씨의 표정은 그 나이쯤 되는 여성들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아내가 무색하게 말끝마다 그 시절의 상식이가 된 남편 덕분에, 그 젊은 상식처럼 설레며 가정을 잘 꾸려가려 애쓰던 시절을 복기하게 된다. 참 오래된 시간이다. 과연 그 오래된 시간의 결이, 그 역사의 무게가 아내 숙이씨의 졸혼 선언을 무력화할 수 있을까? 그저 졸혼의 무력화가 아니라 이 모래알 같은 가족을 '재건'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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