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새로 시작한 드라마 스파이 명월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 저렴하다. 북한 특수공작대 책임자의 표현대로 스파이 한명월은 행동부터 하고 사고하는 전형적인 사고뭉치 스타일이다. 그래서 귀엽다 못해 민망할 정도로 스파이답지 않은데 그래도 몇몇 액션신에서는 액션 명월로 불리고 싶은 한예슬의 의지가 살짝 엿보기이는 했다. 그렇지만 액션 명월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아무리 대역과 카메라 액션으로 허술함을 커버한다 하더라도 절대 속이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모든 스포츠의 기본인 달리기다. 칼로리를 없애기 위해 헬스클럽에서 예쁘게 걷던 실력으로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원초적 기술이다. 한국 드라마에는 그래서인지 여배우들이 달리기 하는 장면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반면 일본드라마를 보면서 항상 놀라는 점은 일본 여배우들의 달리기 실력이다. 그녀들은 적어도 달릴 때에는 예쁜 척, 약한 척이 전혀 없다. 어릴 때부터 자전거로 단련돼서 그런지 그녀들의 달리기는 육상선수를 방불케 한다.

한예슬 역시도 한국 여배우 그 중에서도 아주 대접 잘 받는 귀한 여배우신지라 혹시라도 다칠 위험이 있는 전력질주의 경험이 없었을 터, 싱가폴 거리에서 추격전을 벌이면서도 이건 뭐 ‘나 잡아봐라’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굴욕의 육상솜씨를 들키고 말았다. 그래도 용서가 되고도 남는다. 완벽한 몸매에 게다가 청순한 얼굴까지 달리기가 어떻든 한예슬이 티비에 강림하신 것만으로도 은총이 넘칠 뿐이다. 누가 욕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한예슬이 하이힐이 아닌 운동화를 신은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 여기까지는 이 드라마가 스파이물이라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뿐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스파이 명월은 제목과 달리 로맨틱 코미디일 뿐이다. 앞서 종영한 최고의 사랑과 많이 유사한 면이 보인다고 하지만 사실 한국 드라마의 인물 관계도가 신선한 적은 그다지 기억에 없다. 사실 한국 드라마가 신데렐라에 종속되어 항상 재벌이 등장해야 되고, 재벌이 아니라면 최소한 최고의 스타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문제는 그 뻔한 틀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내야 하는 배우들이 죽을 맛이라는 점이다.

한국에는 발연기하는 외모지상주의 배우들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참 연기를 잘한다. 그러나 작가들이 드라마 속에서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탓에 연기를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잦다. 때로는 대본이 배우를 돕기는커녕 학대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한예슬은 아직은 죽었다 깨나도 연기파 배우는 아니다. 여러 편의 드라마 출연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배우라는 직업보다는 모델 이미지가 더 크다. 그래서 연기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서는 이 드라마를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인간의 기본 감정인 희로애락에 대한 표현은 좀 쉬는 동안 연습을 많이 했어야 했다. 싱가폴에서 명월은 강우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집념의 추격전을 벌인다. 스파이답게 자주 놓치지만 잘도 찾아낸다. 그러나 강우에게 속아 결국 목적달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이 참 어이없다. 명월의 양쪽 운동화끈을 서로 묶어버려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웃긴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운동화끈이 묶여서 뒤뚱거리고 발 동동거리는 한예슬의 모습이 일단 가슴 철렁하게 귀엽기는 했지만 아뿔싸 명월은 스파이 아니던가. 권총은 아니더라도 스파이가 맥가이버칼 정도도 없다니 달리기만 못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성도 참 없다.

거기까지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가 허용하는 허술함이니 괜찮다. 그렇지만 자신을 골탕 먹인 강우에게 화를 내는 명월의 모습은 아무리 한예슬이 예뻐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화를 낸다는 것은 연기의 기본이자 희로애락의 감정 중 그나마 가장 수월한 연기에 속한다. 그것조차 아직 해결이 안 됐으면 참 곤란한 일이다. 그래도 드라마에 강림해준 것은 고맙다. 앞으로 남은 문제는 눈의 호사와 정신의 불쾌감이 싸워 무엇이 이기냐는 것인데, 제발 전자이길 바랄 뿐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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