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로다”

모두가 다 아는 “프로”라는 말이 있다. 프로야구, 프로축구에 붙는 접두사가 아니라 전문직 종사자들을 일컫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을 준인 말이다. 전문직의 범위는 사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개 이 직종의 종사자들은 특정한 과정을 거쳐 공적 자격(license)을 부여받은 이들이며, 어려운 과정을 거친 만큼 일정 수준의 독립성과 자율성에 기초하여 업무를 수행하고 그 성과를 평가받는다. 흔히 전문직으로 변호사, 회계사, 의사 등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이들에겐 부여받은 자율성만큼 직업윤리 또한 엄격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가 지워진다.

국가고시를 통과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자나 PD와 같은 방송 종사자들 역시 한국사회에서는 전문직에 포함된다. 특히 지상파 방송사의 정규직 종사자들은 이른바 ‘언론고시’라는 비공식적이면서도 때론 국가고시보다 더 힘든 관문을 뚫고 들어간 이들이다. 여기에 일반인들은 좀처럼 알기 힘든 취재 및 제작과정을 수행한다는 점, 그리고 언론에 당위적으로 부여되는 중립성이라는 사회적 기대로 인해 이들은 업무의 자율성과 지위의 독립성을 누린다.

▲ 6월 21일 김재윤 문방위 민주당 간사에게 전종철 KBS 국회 출입기자(오른쪽)가 '민주당 수신료 인상 선결요건에 대한 KBS의 입장' 문건을 전달한 뒤 귓속말을 하고 있는 모습. ⓒ오마이뉴스 남소연 기자
특히 방송의 경우, 동일한 방송계에 종사하더라도 이들은 PD협회, 기자협회 등과 같은 직군별 협의체를 만들고 서로의 영역을 간섭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금기를 공유한다. 방송직 종사자들의 자율성은 다른 장르도 그렇지만, 시사·보도 프로그램의 경우 더욱 강조되며 그에 따라 취재윤리와 같은 직업윤리 또한 엄격히 부여받는다. 물론 이 취재윤리의 기준과 조항 역시 외부가 아닌 자신들이 ‘자율적’으로 만든 것이다.

저널리스트의 정체성과 자율성

그럼에도 시사ㆍ보도 프로그램의 제작을 담당하는 기자나 PD들의 자율성은 결코 안정적이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의 자율성은 방송사의 경영진, 정부, 기업, 그리고 시청자라는 다중(multitude)과의 교섭 속에서, 다른 전문직들을 포함한 다른 임노동자들과 어떻게 다른지 스스로 그 차별성을 끌어내며 만들어가야 할 직업적 정체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저널리스트다”라는 정체성의 구축과 그에 따른 자율성의 확보는 굳이 비유를 하자면 두 방향의 교섭 속에서 이루어진다.

한 축은 언론사 간부들과 경영진들, 국가기관, 그리고 때론 광고주로, 때론 기업으로 불리는 ‘자본’과 같은 권력과의 수직적 교섭이다. 이들과의 교섭은 방송사 재원의 문제 뿐 아니라, 취재과정 상의 개입 혹은 편의 제공, 임금과 복지 수준 등 제작과정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을 둘러싸고 행해지는 일종의 헤게모니 투쟁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한 축은 주로 취재의 결과물인 보도로 행하는 시청자 다중과의 교섭으로, 다분히 특정 방송사의 저널리스트 혹은 한국사회 내 기자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다중의 시각, 달리 말해 저널리스트들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평적 교섭이다.

수직적 교섭을 권력과의 교섭으로, 수평적 교섭을 다중과의 교섭으로 본다면, 어떤 사회에서도 두 가지 교섭 모두에서 성공적으로 저널리스트라는 전문직의 정체성을 획득하여 자율성을 보장받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다름 아닌 공영방송이다. 따라서 수신료(license fee)란 다중과의 수평적 교섭 속에서 동의를 얻어내야 할 결과물이지, 방송을 보는/볼 대가로 징수하는 시청료(재원)가 아니다. 같은 논리로, 선후 관계를 따지기는 힘들지만 KBS, MBC와 같은 공영방송에서 시사ㆍ보도 프로그램의 제작 자율성이란 다중과의 교섭에서 확보한 동의를 토대로 방송사 경영진을 포함하는 권력과의 교섭에서 얻어내는 자율성을 뜻한다.

결국 저널리스트가 전문직이라는 직종에 속하면서도 특수한 이유는 바로 이렇게 복잡한 정체성의 구축과 그 결과물인 자율성의 획득에 있다. 그럼에도 말이 쉽지, 이 다중과의 교섭이란 상당부분 취재의 결과물인 보도만을 통해 이뤄지며 반복적인 취재와 제작과정에서 그 교섭의 실체를 마주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자율성의 확보는 임단협이나 방송법의 개정과 같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경영진, 정당, 정부와 같은 권력을 우선 대상으로 하기 쉬우며 이 과정 내 헤게모니 투쟁에서 패했을 때, 바로 저널리스트의 정체성은 방송사의 정체성으로 소급되기 십상이다. 흔히 말하는 “자사이기주의”란 바로 권력과 다중, 이 두 축에서의 교섭에서 모두 실패했을 때 발생하는 가장 패배적인 자율성의 요구일 것이다.

철저한 소외, 완벽한 자율성

흔히 전문직의 특성인 자율성이 빠지기 쉬운 함정, 즉 “나는 프로다”라는 말이 “이 분야는 나만 알고 있는 영역이니 당신들은 간섭하지 말라”는, 속된 말로 “나와바리” 주장이 되어버리는 것은 자신들의 직무 영역을 사적 소유권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런 함정에 방송사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 집단 대다수가 함몰되는 상태가 바로 자사이기주의이며, 다중과의 교섭을 결코 방기하지 말아야 할 공영방송의 경우는 그 결과가 더욱 참담해진다. 최근 몇 달간 벌어진 KBS의 수신료 관련 보도와 기자들의 행태는 이런 이유에서 비참할 지경이다.

취재가 아니라 자사 문건 택배를 하고, 국회의원들과 질문 아닌 논쟁을 벌이며, 급기야 도청이라는 초유의 불법행위까지 의심받는 상황은, 권력과의 교섭이란 자발적 동의를 획득하는 과정이라는 헤게모니 투쟁의 기본적인 교전수칙조차 기자들이 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KBS의 한 기자가 민주당 의원에게 던졌다는 한 마디, “다음 총선 때 봅시다”는 다중과의 교섭은 이미 안중에도 없으며, 권력과의 교섭에서 참담하게 패배했다는 시인에 불과하다.

권력과의 교섭이 그랬다면, 적어도 KBS는 시민단체들의 수신료 인상 전제조건에 대한 응답이라도 주었어야 했다. 그래야 이후의 수신료 인상 논쟁에서 다중과 최소한의 교섭을 행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았을 것이다. 결국 KBS가 수신료 인상을 통해 이룩하겠다고 한 목표 중 가장 규범적인 것, 즉 “자본과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이라는 또 다른 자율성은 제작 자율성도 아니고, 내부 평가에서의 자율성도 아닌 모든 교섭 대상으로부터 버려진 소외가 되어 버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철저하게 고독한 자가 가장 자유로울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얻어 낸 불구의 자율성 속에서 결국 저널리스트들은 관념에선 여전히 전문직이면서도, 현실의 고용관계에서는 회사에 충직한 임노동자가 되어 버린다.

수신료 문제를 앞에 놓고 철저히 소외되어 버린 저널리스트들의 모습은 비단 KBS에만 있지는 않다. 2008년 촛불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시사․보도 프로그램 탄압이 행해지고 있는 MBC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방위적인 초유의 검열과 징계로 인해 우수한 저널리스트들과 PD들이 희생된 과정은 너무도 안타깝다. 그러나 권력과의 교섭에서 처참히 패배해 갈 때, 다중과의 교섭은 단속적이었고 그나마 자신들이 ‘다중을 부르는’ 비대칭적 모양새가 지속되었다. 다중과의 새로운 교섭 방식을 모색하기엔 너무 지쳐서인가, 서슬 퍼런 내외부의 검열 속에서 이들은 또 다른 권력과의 교섭 경로를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경쟁력 확보’를 위한 민영 미디어렙이었다. 미디어렙 문제야 말로 “당신들은 이해할 수 없는 우리만의 영역”인 전문직 자율성의 함정이 아니었던가.

소외된 노동자, 저널리스트

기만적이고 패배적인 자율성을 유지하는 한 공영방송 저널리스트들은 단지 관념 속에서만 전문직일 뿐, 현실에선 자본에 종속된 임노동자가 되어버린다. 나는 다른 글에서 방송사의 소유구조에 상관없이 두 가지 조건이 방송을 ‘자본’으로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나는 자율성을 누리는 전문직들의 임노동화를 통한 계급관계의 형성이며, 다른 하나는 재원이나 시청률로 다중을 추상화시켜 버리는 수용자들의 상품화이다. 철저히 소외된 노동은 다시 그 소외된 생산물을 소비하는 이들마저 소외된 이들로 여기게 만든다. 최근 실망을 감출 수 없었던 KBS와 MBC의 유성기업, 한진중공업 관련 보도들은, 공영방송의 역할을 따지기 이전에 이미 저널리스트들의 거짓된 자율성과 우리를 보는 그들의 시각을 알려주는 지표일 뿐이다.

KBS와 MBC가 비록 그 소유에 있어 ‘공영’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자회사 중심의 정체성 형성과 그 결과인 기만적 자율성이야말로 공적 서비스로서의 방송이 자본으로 변신하려는 지점임을 알려준다. 오래전 마르크스의 말처럼 “사적 소유가 소외된 노동을 낳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이 사적 소유를 낳는다.” 자신의 회사에만 종속되어 다중과의 부단한 교섭 속에서 인정받아야 할 전문직의 정체성이 사라졌을 때, 바로 그 때 저널리스트들의 ‘소외된 노동’이 시작된다. 어쩌면 이런 넋두리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노동은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Modus Vivendi(모두스 비벤디)란 양식 혹은 방식을 뜻하는 라틴어 Modus와 삶을 뜻하는 Vivendi의 합성어로 “생활양식”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가기 위해 서로 경합하는 이들 사이의 ‘잠정적인’ 적응이나 타협을 숨은 의미로 담고 있습니다. 삶의 잠정성이란 달리 보면 불안함이기도 합니다. 국가권력, 자본, 그리고 미디어와 같은 완고한 대상과 우리의 삶이 맺어지는 방식 또한 사실은 언제나 이렇게 불안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이 코너에서는 바로 그런 불안함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해보려 합니다. 모든 완고한 것들의 불안함을 드러내는 작업이야 말로 비판의 목표이며 희망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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