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좋아하는 남자라면 분명 무사 백동수를 에오라지 기다렸을 것이다. 게다가 역사적 논란거리인 정조 암살의 배경에서 펼쳐지는 잡초 같은 무사들의 활극에 대한 기대감은 제2의 추노를 머릿속에 그려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 거친 남자들의 로망이자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최민수와 카리스마의 대명사 전광렬의 존재만으로도 매주 월화에는 술 약속을 꺼려할 이유가 되길 간절히 바랐을 것도 틀림없다.

그렇게 기다려온 무사 백동수 첫 회에 대한 소감은 일단 더 기다려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다. 추노처럼 첫 회의 강렬한 맛은 덜 하지만 그래도 스토리의 골격이 흥미진진하기에 충분히 인내를 발휘할 수는 있다. 아직 본격 스토리로 진입하기까지는 좀 더 배경을 설명할 시간이 필요하지만 다소 어설픈 면이 있어도 처음부터 최민수와 전광렬의 들판 대결은 마치 우정인 듯, 숙명인 듯 두 남자의 질긴 인연의 복선을 깔아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무사를 다룬 드라마치고는 액션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미 추노의 액션에 익숙한 시청자의 눈높이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것이 최민수, 전광렬이 액션을 하기엔 무리였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차피 진짜 액션은 백동수가 자라 청년이 된 후를 기약할 수 있으니 그저 맛만 봤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뭔가 김빠진 듯한 액션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사건의 시작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병자호란의 굴욕을 상징하는 삼전도비를 훼손한 것에서 시작한다. 이를 기화로 노론은 청을 움직여 세자를 역모로 몰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세자를 죽일 수 없었던 영조는 백사굉을 세자를 대신해 참수하고 삼족을 멸하도록 한다. 전광렬은 바로 이 백사굉의 친구로서 식솔을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백동수는 그러니까 백사굉의 아들이다.

그러나 삼족을 멸하라는 죄를 받은 이상 백동수가 무사할 수는 없었다. 노론의 포도대장은 결국 전광렬과 백동수를 잡아들였다. 그리고 전광렬은 참수, 백동수에게는 팽형이라는 형벌을 집행코자 했다. 그 형이 집행되려던 찰라 사도세자는 전광렬을 살리라는 교지를 들고 형장에 나타난다. 허나 교지에 백동수에 대한 구명은 없었고, 전광렬은 아들을 부탁한다는 친구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자기 한 팔을 내어놓을 테니 아기를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하자 포대대장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드라마는 아주 커다란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른다. 하나는 어명에 의한 형벌을 현장에서 포도대장 따위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왕권보다 신권이 강한 때에는 선참후계(먼저 처결하고 나중에 보고하는)의 무례가 빈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장에서의 대리형벌에는 해당될 수 없다. 게다가 형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포도대장의 입에서 그나마 선참후계의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포도대장의 어처구니없는 월권은 갓난아기를 팽형에 처하려는 엄청난 역사날조에 비교하면 애교에 불과하다. 물론 조선에 팽형(烹型)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드라마에 묘사된 것이 팽형이라는 낯선 형벌이 틀리지는 않다. 그러나 팽형은 역모죄를 다스리는 형벌이 우선 아니다. 팽형은 주로 관리들의 비리를 다스리는 일종의 인격살인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로 끓는 가마솥에 사람을 넣어 죽이는 실질 형벌이 아니라 불을 대지 않은 가마솥에 들어갔다 나오는 시늉을 하거나 혹은 호패를 끓는 가마솥에 삶았다는 말도 전한다. 어쨌거나 실제로 사람을 개나 소처럼 끓이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팽형은 실제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는 않아도 그 대상의 인격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서 팽형이 집행되면 그 가족들은 곡을 하고 장례를 치러야 했다. 팽형을 당한 사람은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닌 허깨비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죽을 때까지 소복과 산발할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일반 백성이면 또 모를까 체면을 중시했던 때에 이런 차림의 삶이 참수보다 가볍다고는 할 수 없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 형벌이 자주 내려지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사 백동수가 그린 팽형 장면은 철저히 역사날조에 불과하다. 아무리 드라마가 허구를 용인한다지만 이처럼 엉터리로 상황을 만드는 것은 가뜩이나 역사교육이 축소된 현실에서 대단히 위험한 짓이다. 이는 분명 갓난아기를 끓는 가마솥 위에 올려놓는 잔혹한 장면으로 흥행을 노린 것인데, 아무리 드라마 흥행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갓난아기를 학대한 것까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설혹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갓난아기를 이용하는 비인륜적 행위였다는 점에서 깊은 반성이 요구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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