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는 방송 3사 가운데 시청률 1위로서 전통적 뉴스 강자지만, 시민사회로부터 받는 평가는 방송 3사 가운데 가장 싸늘한 상황입니다. KBS가 시민사회의 비판에 대해 ‘참여정부 시절에는 보수단체가 편향성 논란을 제기했다’며 귀를 닫고 있는 가운데, KBS 기자는 논란의 중심에 선 KBS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미디어스>는 익명의 KBS 기자로부터 직접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보다 자유롭고 신랄한 비평을 위하여 필자와의 협의를 거쳐 익명 형식으로 내보냅니다. ‘즐감’ 부탁드립니다!

▲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영화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
한국 제목으로 ‘대통령의 음모’, 영어 제목으로 ‘All the president's men’이라는 영화를 처음 본 건 중고등학교 때였을 거다. MBC 주말의 명화였는지, KBS 토요명화였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기억나는 건 닉슨의 사임을 가져온 워터게이트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친 두 기자의 모습에 속된 말로 ‘뿅’ 갔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로버트 레드포트와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두 기자가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이라는 전설적인 탐사보도 기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쨌든 이 영화는 내가 밥벌이로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워낙 유명한 영화이고, 영화가 다룬 사건도 워낙 큰 사건이라서 다들 잘 알겠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은 누군가 민주당사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발각되면서 시작된다. 이 사건은 단순 절도 사건으로 묻힐 뻔했지만, 두 기자의 집요하고 끈질긴 (지금 기준으로 봐도 참 집요한 기자들이다.) 취재로 마침내 진실이 드러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사건, 이 영화의 발단은 다름 아닌 도청이었다.

영화 속의 기자들, 그리고 그 기자들이 일하는 워싱턴 포스트라는 언론사는 이 도청 사건을 추적한다. 정부와 여당 쪽에서 들어오는 온갖 종류의 압력을 돌파하고,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 무식한 (전문용어로 맨땅에 헤딩하는) 취재 방식으로 하나하나 단서들을 확보한다. 그리고 결국 언론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최종심급이라는 상식적인 인식의 근거를 튼튼히 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뻔하다. 요즘 우리 KBS라는 언론사가 받고 있는 ‘도청 의혹’을 생각하다보니 이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우리 KBS 기자들은 지금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권력의 도청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정 반대로 KBS 기자들이 도청의 장본인으로 지목을 받고 있다. KBS 기자들이 야당의 비공개 회의를 도청해 여당에게 넘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 보면 도청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를 보고 기자가 되겠다고 했는데, 이제 도청을 했다고 지목 받는 기자 집단의 일원이 되고만 셈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치욕적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대부분의 언론사가 그렇지만 KBS 보도본부 기자들도 이른바 ‘가족주의’가 무척 강한 집단이다. 이번 도청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 보도 책임자 등은 당연히 책임을 져야겠지만 사건에 연루된 개별 기자도 형사상, 직업 윤리상의 책임을 피하기 어려워진다. 맞는지 안 맞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흘러나오고 있는 이름들은 경력이 그리 길지 않은 기자들이다. KBS보도본부는 그래서 조용하다. 누구도 크게 떠들지 못한다. 이 찜찜한 침묵에서 진실이 뭐든 그냥 조용히 덮였으면 하는 바람들이 읽힌다.

하지만 상황이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고 있다. KBS 홍보실에서 내 놓은 입장은 사실상 도청행위를 시인하는 투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이른바 도청행위를 한 적은 없다.’ 이 행간에 어떤 의미가 숨어있는지 유추하지 못할 기자들은 없을 것이다. 지금 KBS에서 “우리는 도청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라고 자신 있게 발언하는 사람은 없다. 사장이라는 사람이 말했다고 전해지는 ‘벽치기’, ‘귀대기’, ‘전통적인 취재 방식’ 등등의 표현은 이 사람이 지금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게 한다. 경찰도 특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KBS를 지목하고 있다.

KBS 수뇌부들은 지금 상황을 민주당과의 갈등 국면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 수신료 인상 때문에 참았는데, 이제 민주당을 봐주지 않겠다’는 식의 말들이 공식적인 회의 시간에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KBS가 도청에 연루됐다는 말을 민주당에서 흘리고 있고, 그래서 민주당을 혼내주겠다는 뜻이다. 어떻게? 물론 뉴스로 말이다. 어떤 KBS 기자가 수신료 인상에 반대하는 민주당 의원에게 “내년 총선 때 봅시다”라고 협박을 했다는 기사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이제 그 협박을 집단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도청은 그냥 덮읍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당, 내년 총선 때 봅시다.”

▲ 28일 KBS '뉴스9' 4~5번째 꼭지 캡처. KBS는 자사 메인뉴스를 동원해 "민주당의 합의 파기로 국회가 무력화되면서 30년 만에 수신료 현실화는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며 민주당을 맹비난했다.
천박하고 한심한 현실 인식이다. 상황은 그게 아니다. 향후 진실이 규명이 되건 안 되건 KBS는 이미 국민들에게 “도청이나 하는 집단”으로 낙인이 찍혔다. 얼마 전 취재현장에서 시민들에게 폭행을 당한 KBS 기자들은 “국회에서 도청이나 하지 왜 여기 왔냐”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이병순 사장, 김인규 사장 같은 낙하산들이 들어오고 KBS가 정권의 국정철학을 구현하면서 들은 욕은 ‘비겁’, ‘부역’, ‘나팔수’와 같은 수동적인 단어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KBS 기자들은 권력을 위해서 부역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도청까지 서슴지 않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도청 방송’이라는 오명은 쉽게 지우지 못할 것이다. 이제 수신료 인상은커녕 KBS의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을 요구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단순한 공정방송, 지배구조 개선 같은 구호를 넘어서 더 깊은 수준의 체질 개선을 요구 받을 것이다. 외부에서는 이제 KBS를 자체 정화 능력이 없는 집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 숨통을 우리가 막아 버리고 말았다.

정상적인 집단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진실을 추구하는 기자들이라면 내부에서 움직임이 필요하다. “열심히 취재한 건데 뭐가 문제야?” 라는 식의 안이한 현실 인식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진상 규명은 물론이고, 무엇이 우리를 여기까지 망쳐놓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진행하지 않으면 결국 외부의 힘에 의해서 진행될 것이다. 그 수모와 수치와 모멸은 감당하기 힘들 거다.

앞서 말한 영화 ‘대통령의 음모’는 닉슨이 재임 임기를 시작하는 TV화면을 배경으로 열심히 기사를 타이핑하는 기자들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자막이 올라간다. 워싱턴 포스트의 폭로 이후 도청을 시인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계속되는 자막. 사건이 벌어진 뒤 2년 여 만에 대통령이 사임한다. 도청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임기 도중 대통령이 사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 민주주의의 큰 오점이다. 하지만 이들 기자들 덕에 미국 민주주의는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자 이제 우리로 돌아오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청자들이 KBS에 몰려와 불을 지르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나. KBS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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