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갓 넘었을 때, 여전히 난 시골 글쟁이였다. 사람냄새 가득한 그곳이 결코 싫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영글 때까지 시골에서 나고 자란 터라 고향처럼 푸근했다.

만 5년을 채운 후, 시골 주간신문사 기자생활을 그만둔 것은 순전히 ‘행복’ 때문이었다.

지극히 주관적이며 그 측정값에 평균을 내는 것은 할 짓이 아닌, 오히려 스코어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 합리적일지 모를 ‘행복’에 대한 생각 말이다. 시골 글쟁이 생활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조금 부족했다. 결핍이 계속 삶을 지루하게 했다. 그 결핍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당시 막 등장한 포털 사이트 지식검색창에 ‘재미있게 사는 법’이라는 주제어를 입력하고 검색하는 빈도수가 조금씩 잦아졌다. 지금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의외로 개그맨 ‘전유성’이 검색결과로 등장하곤 했다.

▲ 그동안 발행된 <토마토> 표지 사진 ⓒ오마이뉴스 심규상
여하튼, 그런 고민을 하다 ‘홀로 행복하기’ 내지는 ‘홀로 즐겁기’는 정말 어렵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생각은 계속 꼬리를 물었다. 홀로가 어렵다면 ‘함께 행복하기’, ‘함께 즐겁기’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행복과 즐거움 등 추상적이기만 한 고민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술과 담배, 연애, 코미디, 칭찬, 여행 등 행복과 즐거움을 구체적인 영역을 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낱말을 나열했다. 풍속을 크게 저해하지 않으면서 저변이 넓어 다양한 변종 행위를 가능케 하는 ‘무엇’일까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술이었다. 예술 영역의 사회적 위치야 그 시대에 따라 끊임없는 변화를 겪었으나 여하튼 그 궁극은 ‘행복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 닿아 있는 듯했다. ‘노래’라면 청중이 ‘욕’으로 오해할 정도의 실력을 갖췄고 그림 부문 역시 고등학교 성적표 미술 칸에 선명하게 찍혔던 ‘양’이라는 글자를 아직도 기억한다. 예술 파트에 관해서는 어떤 영역이든 젬병인 필자가 내린 결론치고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뮤지컬이나 연극배우, 농사짓는 싱어 송 라이터 등을 잠깐 생각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고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행하는 데 있어 ‘그나마 잘 할 수 있는 일’은 중요한 변수였다. 5년을 시골 글쟁이로 살면서 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익숙한 것이 글쓰기와 사진 찍기였다. 당시, 시골기자는 사진기자와 함께 취재현장에 다니는 호사를 누리기 어려웠다. 혼자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했다. 덕분에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었다.

이런 생각 꼬리 물기와 변수에 대한 고려를 통해 도달한 결론이 ‘잡지 창간’이었다.

충분히 고민했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잡지 창간 토대로 삼은 것은 ‘대전광역시’다. 대학시절을 보내고 그 어느 도시보다 지루해 보이는 곳, 느림의 미학을 논하는 마당에 ‘지루한 도시’라는 평가가 지탄을 받을 만하지만 당시 판단은 그랬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 월간 토마토를 창간한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 한 건물 ⓒ이용원
바로 창간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 대전에 기반을 둔 신생 언론사에 입사 지원을 했고 별 무리 없이 새 직장을 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안정적으로 지역을 이해하고 소위 ‘네트워킹’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녹록치 않았다. 언론사는 입사 3개월도 안 돼 흔들리기 시작했고 나도 함께 흔들렸다. 흔히 고생한 사람에게 위로한답시고 ‘조금 비싼 등록금 주고 좋은 경험했다.’라고 생각하라는 조언을 하곤 한다. 어지간하면 하지 말자. 대부분 그런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 그 등록금은 조금 비싼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래도 하나 분명하게 배운 것은 있다. ‘사람’이다. 치밀한 사업계획과 명백한 수익모델 등 사업에 망하지 않는 몇 가지 흔한 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충분한 자본과 명확한 수익모델도 중요하지만 그건 알파다. 정작 열쇠는 ‘사람’이었다.

도덕 선생 같은 이야기 하지 말라 퉁 놓을 필요 없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명상하며 얻은 교훈이 아니라 1년 가까이 급여 체납을 감수하며 얻은 진리니 말이다. 다시 생각해도 아프다. 급여가 통장에 찍히지 않는 대신 시간은 충분했다. 사무실을 폐쇄하지 않았으니 책상에 앉아 사업구상을 구체화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절실함’은 오죽했겠는가. 즐거운 삶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겠다고 떠난 첫 여정이 가시밭길이었으니 말이다.

어떤 색깔의 잡지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부분보다는 잡지를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이 더 먼저 떠올랐다. 잡지를 매개로 사람을 모으고 그 모인 사람과 함께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우리는 잡지를 펴내고 구독자는 읽거나 보는 단순한 관계를 뛰어 넘어 함께 교감하며 작당을 모의하고 싶었다. 그것은 일상적 감동이 꿈틀대는 도시 만들기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상상하며 준비하는 시간, 부정적 측면보다는 온통 긍정적 장밋빛 미래만 눈앞에 선했다.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수정하면서 연신 싱긋거렸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혼자 키득거리기 일쑤였다.

사업계획서가 조금씩 모양새를 갖춰갈 때쯤 주변 지인에게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혼자 책상 앞에 앉아 흐뭇해 할 때는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반응이 나왔다. 당시 연배가 좀 더 위였던 한 문화기획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녀는 출판업계에 종사한 적이 있는 나름 관계자였다. “예로부터 그런 말이 있어요. 돈이 좀 많은데 정말 보기 싫어서 망하게 하고 싶으면 잡지를 만들자고 꾀여라.”

그럼 3대는 계속 빚에 허덕이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재산 들어먹기 딱 좋은 영역이라는 말이었다. 좀 더 과학적(?)인 분석을 내놓는 이도 있었다. 멋지게 ‘텍스트의 종언’이라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고 술로 불콰해진 얼굴에 비웃음을 띄며 “요즘 누가 책을 읽어. 이제 보는 시대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점점 어깨는 내려가고 ‘잡지 창간 계획’은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콩깍지는 남녀 사이에만 씌는 게 아니었다. 한번 꽂힌 일을 중단하는 것은 시작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조언을 듣는 단계에서 함께 할 사람을 찾는 단계로 넘어갔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푸념하듯 이야기한 사업계획에 반짝 관심을 보인 친구와 함께 일했던 경험이 있는 후배 둘이 붙었다. 상황과 감언이설이 만들어 낸 절묘한 기회였다. 친구는 또 다른 친구 한 명을 소개했다. 홀로 공상하듯 진행했던 ‘잡지 창간 계획’이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2006년이었다. 후배 어머니 소유에 2층 집도 당분간 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면적이 6평 밖에 안 되는 터에 2층 집을 올린 경이로운 건축 양식은 향후 우리 잡지 미래를 예고하는 복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해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두고 건물 청소와 책상 제작을 마무리했다. 시작이었다.

대전광역시에 <월간 토마토>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만 4년을 넘어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금을 만들어내려 했던 연금술사처럼 ‘뭉클한 감동’에 중독돼 계속 실험을 반복하며 주위를 괴롭힙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월간지를 만들면 한 달 중 열흘은 빈둥빈둥 놀아도 되는 줄 알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는 월간지를 만들려면 한 달을 60일처럼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설픈 도전을 계속하며 히말라야라도 오르는 사람처럼 결기에 차 있다가도 고집불통 철딱서니가 아닌가 싶어 은근 뒤통수가 간지럽기도 합니다.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잡지 만들기는 여전히 태풍에 휘둘리고 표류하며 여행 중입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우리끼리 치열한 그 여행을 가볍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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