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회장의 합의는 법적 효력이 없다"

오늘(28일) 아침 라디오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 말이다. 순간 멍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렇다. 지금은 산별노조의 시대다. 합의가 법적 효력이 없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대목이었다.

산별노조를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고는 별개다. 전혀 생각 못할 상황이었다. 어제(27일) 연합뉴스의 속보를 시작으로 모든 언론이 일제히 '한진중공업 노사 합의'를 전했다. 의심할 여지없는 '팩트'였다. 일치된 메시지였고 광범위한 전달이었다.

민주노총 법률원에 전화를 걸었다. 권두섭 변호사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산별노조인데 당연히 지회장은 노조위원장이 아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합의는 어디까지나 노동조합의 대표자와 사용자가 체결하는 것이다. 한진중공업 노조는 기업별 노조가 아니다. 산별노조에 속해 있는 한진중공업 노조의 위원장은 당연히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위원장이다.

권두섭 변호사는 노조의 "교섭권과 체결권이 모두 금속노조위원장에게 있다"고 했다. 지회장은 노조위원장으로부터 "위임 받았을 시에만 권한을 대리 행사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 역시 "조합원들의 의사를 묻는 절차를 통해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권 합의는 기업별 노조 시절의 관행이다. 개별 사업장의 노조위원장이 은밀히 사측과 만나 모종의 거래를 통해, 얼렁뚱땅 합의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던 시절의 관행이다. 권 변호사는 어제의 합의는 "합의의 이해당사자들에게 의사를 묻는 절차조차 없이, 권한도 없는 지회장이 직권 조인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어제, 트위터 등에서 연합뉴스 오보설이 돌았을 때 내심 '오보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많은 네티즌들은 '연합뉴스가 의도적으로 오보를 퍼뜨리고 있다'는 멘션을 날리고 있었다. 속보가 빚은 혼란일 뿐,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몇 개의 기사를 더 검색하고 사실을 확인한 후 '오보가 맞느냐'는 편집장의 물음에 자신 있게 '오보는 아니다'고 알렸다.

그러나 오보였다. 현장에서 노조원과 용역의 충돌이 언제 있을까에 골몰하는 기자 중 그 누구도 산별노조의 원리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사회 전체가 한진중공업 사태에 말을 보태며 문제의 해결을 촉구 혹은 진압을 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이도 '극적타결'이 누가 누구와 합의하면 되는 것인지 전혀 모른 채 뜬구름만 잡았던 셈이다.

▲ 배우 김여진 씨의 트위터(@yohjini) 화면 캡쳐
배우 김여진 씨는 오늘 아침 트위터에 이런 맨션을 남겼다. 자신이 기자였다면, "'속보'를 내기 전에, '극적타결'이라는 제목을 갖다 쓰기 전에 분명 질문을 던졌을 것"이라며, "정리해고 철회 요구는 받아들여졌나요?", "그럼, 김진숙 씨는 내려오시는 겁니까?"를 물어야 하지 않았냐고 되물었다. 너무나 당연히 말이다.

언론은 174일 째 크레인 위에 머물고 있는 김진숙 씨의 문제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노사 합의 소식을 전한 공영방송 KBS와 MBC의 기자들은 리포트에서 김진숙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SBS가 겨우 '노조 측은 고공 크레인에서 농성중인 민노총 지도위원 김진숙 씨의 퇴거를 책임지기로 했다'며 여전히 그녀가 거기에 있음을 알렸을 뿐이다. 동아일보 같은 매체는 아예 '한진중 노조가 원칙에 무너졌다'며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관철시킨 회사의 방침을 추켜세웠다. 원칙? 합의 권한이 없는 지회장과 합의하는 회사가 무슨 원칙을 지켰단 말인가.

한진중공업 노사 합의 보도는 한국 언론의 실력을 적나라하게 노출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언론은 합의의 당사자가 누구인가라는 최소한의 사실 관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당성 없는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대다수 조합원들은 '일부 반발 세력'으로 묘사했다. 위법을 저지른 자들을 옹호하고, 적법을 요구하는 자들을 비난한 격이다.

▲ 28일자 동아일보 1면. 이 기사를 쓴 동아일보의 기자가 생각하는 '원칙'은 무엇일까? 동아일보는 한진중공업 파업의 교섭권과 체결권이 지회장이 아닌 금속노조위원장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할까?
김여진 씨의 멘션에 답하고자 한다. 궁금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무얼 물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마땅히 물어야 하는 것들은 응당 그러려니 했다. 내려오지 않은 김진숙 씨의 안부를 언론이 전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국 언론은 원래 그런 문제에 무심하다. 정리해고 철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역시 당연하다 생각했다. 한국 자본은 원래 그런 합의를 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김여진 씨가 맞았다.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이 합의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한국 언론에 종사하느라, 상식적으로 너무 당연한 그걸 생각해내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한국 언론은 당연하지 않다. 상식에 훨씬 못 미친다. 미안하다, 무식해서.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