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국이 MBC 사옥 앞에서 삭발식을 했다. 삭발은 시위 현장에서 비폭력 평화의 방법으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김흥국이 비주얼을 내세우는 연예인은 아니더라도 삭발이라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비장하게 각오를 가졌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흥국의 비장함을 알아주는 이는 그의 해병대 친구들과 정몽준 의원밖에는 없는 것 같다.

김흥국은 삭발식에 앞서 “나는 순수하게 방송했고 특정 정당을 위해 일하거나 방송을 이용해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적도 없다"며 "이렇게 삭발식을 하는 이유는 더 이상 다른 연예인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해서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흥국에 말에 공감을 표하는 이가 드물다. 어지간한 기사에 악플이 들끓는 추세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김흥국의 삭발식을 대하는 여론은 싸늘해 보이기만 한다.

자신이 마지막 희생자가 되길 바란다는 말은 아름답다. 그것이 그의 진심이 아닐 것이라고 폄하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힘을 가질 수 없다. 진정 그가 동료인 연예인들에 대한 부당한 압력과 보복을 막고자 하는 대승적 차원이었다면 김미화, 김제동 등 대표적 정치적 피해자들을 위한 말 한 마디라도 남겼어야 했다. 김흥국의 삭발을 대하는 한 댓글이 그에 대한 여론을 대변한다.

‘불의는 참고, 불이익은 못 참는 극한의 이기주의가 된 김흥국에게 연민을 느낀다’라고 했다. 김흥국 이전에 김미화가 MBC 임원진의 주도 하에 강제 하차했다. 그때 지금 김흥국이 하는 시위나 삭발식은 고사하고 그저 ‘안타깝다’는 말 정도만 했더라도 그의 말에는 최소한의 힘이라도 실릴 것이다. 그러나 삭발까지 불사한 그의 의지는 그저 자신의 불이익을 부당한 압력으로 포장하려는 행위로 보는 이가 많다.

한류 스타보다 희소가치가 있는 개념 연예인은 어느 날 갑자기 한 마디 툭 던져서 되는 것은 아니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말 필요할 때 소수의 연예인들이 진정 불이익을 감수하고 소신을 밝혀왔다. 최근 댄싱 위드 더 스타로 새롭게 주목받는 김규리(전 김민선)는 그로 인해 엄청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럴 때 박중훈, 정진영 등은 동료이자 후배인 김규리를 감싸주는 진정한 이타의 자세를 보였다. 물론 그때 김흥국이 침묵했다고 욕할 수는 없다. 김흥국보다 훨씬 더 대중의 혜택을 많이 보는 초절정 인기 연예인 모두가 침묵했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의 MBC는 도무지 우리가 알던 그 마봉춘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하면 김흥국의 항의에 동조하고픈 심정도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MBC가 싫어도 김흥국이 가진 진심이 너무 적기 때문에 여론은 그를 위해 움직여주지 않고 있다. 김흥국의 주장대로 그는 요즘 막나가는 MBC의 피해자일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한편 17일의 삭발식을 보면서 작년 이맘때쯤의 삭털식을 떠올린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삭털식은 월드컵 16강에 대한 축구광 김흥국의 이벤트였다. 일 년 새 김흥국은 코털도 밀고 또 머리카락도 밀었다. 삭털식은 축구광인 그가 월드컵 승전보에 들떠 벌인 이벤트였고 삭발식은 그와 전혀 다른 의미의 결연한 시위였다. 그런데 왠지 그의 삭발식 또한 삭털식과 겹쳐 보인다. 삭털식이 됐건 삭발식이 됐건 그의 행위에 대한 솔직한 심정은 왠지 웃긴다는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되고 진심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다.

그러나 그가 정몽준 의원과 가깝고, 개념 연예인으로 살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삭발식을 우습게 보는 세태는 우울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피해자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고, 정의로운 자의 인권만 지켜져야 하는 것 역시 아니다. 김여진이 되지 못한 김흥국이지만 그의 삭발식에 냉소했던 잠깐의 순간이 부끄럽기만 하다. 적의 동지는 곧 나의 적이라는 논리가 지금의 김흥국의 상황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를 일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