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송도영 교수의 “제3세계의 사회와 문화” 강의는 북아프리카 튀니지 남쪽의 고므라센을 배경으로 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이 땅의 주민들은 불란서 여러 도시로 이주하여 전통 제빵 기술을 활용해 아랍제과점으로 성공한다. 자리를 잡은 이민자들은 고향 친척들을 불러들여 고용하고 자립을 도왔다. 그러나 유목민 출신과 농민 출신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었다.

그들의 모습이 어딘지 낯익다. 1970년대 초반에 결혼한 큰이모는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에 다니시던 이모부와 서울 구로구에 터전을 잡았다. 그리고 경북 영덕에 살던 외삼촌들과 이모들이 한 분 한 분 서울로 올라와 큰이모 댁에 머물며 지내다 일자리를 잡았다. 독립해서도 멀리 떨어지지 않고 가까이 모여 마음으로 의지하며 산다.

그 시절에는 그런 집이 한둘이 아니었다. 농촌 젊은이들이 일터를 찾아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었다. 영남에 뿌리를 둔 기업은 동향 사람을 선호했고 호남을 모태로 하는 회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어떤 지역을 꼭 짚어 배제하기도 했다. 거주지에서는 자연스레 같은 말씨를 쓰는 이들끼리 어울려 향우회를 조직했다. 정치인들은 본고향을 은근히 내세우며 자기 실속을 챙겼다.

필자가 찍은 미국 동부 대서양 연안 Jones Beach

내가 살던 금천구는 민주당 텃밭이라 불리는데 남도에서 올라와 정착한 분들이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데 힘입은 바 크다. 그러다보니 지지후보에게 투표해봤자 떨어지기만 하는 친척들의 불만이 컸다. 선거철을 즈음한 가족모임 밥상머리에서 집안어른들의 정치이야기가 거침없이 쏟아졌다.

“걔네들은 언젠가는 뒤통수친다”, “IMF외환위기는 김대중 때문이다”, “경상도 번호판 달고 광주에 가면 주유소에서 기름 넣기 전에 ‘김대중 만세’ 삼창시킨다더라”, “5·18 광주사태에 북괴군이 개입했다더라”, “DJ는 빨갱이다”, “노무현은 DJ양자다” 등등 정해진 레퍼토리가 있었다.

가끔 네 견해는 어떠냐며 물어보시기도 하셨는데 이십대 시절에는 이분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드려야겠다는 어쭙잖은 다짐으로 지역감정과 색깔론이 난무하는 대화에 비장하게 뛰어들었다. 핏대를 세워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높여가며 열변을 토했다.

정신없이 한참을 떠들다 내게로 향하는 따뜻한 미소 담긴 뭇시선을 바라보고 문득 깨닫는다. ‘내가 재롱잔치 무대에 섰구나!...’ 겸연쩍어 가만히 물러섰다. “우리 종훈이 똑똑하네~~~”하시며 대견스러워 하시는데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분들이 선거 때마다 가볍게 주고받는 고상하지 않은 언어유희에 심각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네들이 살아온 세월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보다 여기면 그 뿐이었다.

이후 이종 형이 빛고을 아가씨와 결혼하고 아우가 금호건설에 입사하고 또 내가 익산과 영광에 기반을 둔 원불교로 출가하다보니 부모세대의 편견도 예전 같지는 않다. 게다가 동네에 중국동포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전라도니 경상도니 하는 얘기도 희미해져간다.

언젠가 부친께서 “너는 경상도 사람이다”라고 하셨을 때 ‘사투리도 안 쓰고 거기서 2년밖에 안살아 본 아들에게 왜 그러시나’하며 가볍게 흘려들었으나 이제는 당신의 정체성을 자식에게 보여주고 싶으셨으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할아버지는 영양 남자였고 할머니는 안동 예안댁으로 불렸다. 아버지, 어머니 대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를 TK사람이라 인식하게 되었으며 나는 국제인을 꿈꾸는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아마도 한 살배기 조카는 세계시민이 될 것이다.

무엇으로 이름 붙여 아이덴티티 삼든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자비, 예수님의 사랑, 공자님의 어짊과 한 치도 다르지 않는 성품을 품은 생명을 지닌 소중한 존재이니 억양이 다르다고 색안경을 낀 채로 남을 손가락질 할 필요야 있겠는가. 이웃에게 알게 모르게 입은 은혜를 갚기에도 인생은 짧다.

장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고, 세상에 새로 나타난 사람은 머뭇거리던 예전 사람을 쫓아낸다 – 증광현문(增廣賢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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