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코로나19로 봉쇄된 두 달 동안 중국 후베이성에선 가정폭력이 2배나 늘었다고 한다. 중국뿐인가. 프랑스, 영국, 북아일랜드 등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몇십 프로씩 증가 중이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신고 건수가 줄었다고 한다. 가정의 평화를 찾아서? 외려 전문가들은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며 우려를 표명한다.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하소연은 이어진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빠, 엄마들은 매끼 식사를 해결하느라 지쳐간다.

함께 있으면 좋을 줄 알았는데, 더 힘들다. 이렇게 가족 때문에 지쳐갈 때 박카스 같은 영화 한 편? 바로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이다.

보드게임밖에 모르는 아버지

영화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 스틸 이미지

영화를 여는 사람은 바닷가를 서성이는 아버지 앨런이다. 이미 바닷가에 와서 서성이면서도 짐짓 아직 도착도 안 한 듯 시치미를 떼 보지만 갈매기 소리 때문에 거짓말이 들통나버리고 마는, 속이 뻔히 보이는 늙수그레한 아버지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배우 빌 나이가 연기한다.

빌 나이하면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어바웃 타임>에서 오래도록 옷장 속을 들락거리며 시간을 왔다갔다 했던 노회한 선배 ‘타임 슬리퍼’ 아버지를 떠올리면 이미지가 딱 그려질 것이다. 거기에 <러브 액츄얼리>에서 대놓고 자기가 막 살았다며, 크리스마스이브에 1등의 기적이 생기면 옷을 벗겠다던, 그래서 기타 하나로만 몸을 가린 채 1위 퍼포먼스을 한 락스피릿 충만한 노년의 락스타라면 어떨까?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그의 연기를 통해 감정이 흔들리게 된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보드게임밖에 없는 아버지 역에 빌 나이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그 ‘보드게임’이 사단이었다. 피터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형과 피터가 보드게임을 하다 형이 집을 뛰쳐나가 버렸다. 그리고 피터가 결혼을 해 아들이 청소년이 된 이즈음까지도 아버지는 실종된 형을 찾는다. 그런데 연락이 왔다. 신원불명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아버지와 피터는 이제 이 바닷가에서 만나 그 신원불명의 시체가 형인지 확인하러 갈 예정이다.

뜬금없이 아이스크림 트럭에 다가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는 대신, 그림 그리는 아들 피터의 그림 자랑을 하는 아버지. 당연히 돌아오는 건 아이스크림 트럭 주인의 냉랭한 응대다. 그렇듯 아버지는 어딘가 세상과 핀트가 좀 어긋나 보인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열심히 형의 실종 전단지를 붙인다.

그런데 아버지가 잘하는 게 있다. 바로 보드게임이다. 피터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 아버지와 피터. 그곳 호텔 1층 바에서 아버지는 자신들처럼 혹시나 신원불명의 시체가 자신들의 아들일까 하고 온 부부를 상대로 보드게임을 한다.

분노조절장애 아들

영화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 스틸 이미지

하지만 피터는 그런 아버지를 '극혐'한다. 심지어 아버지로 인해 돈을 잃은 부부에게 대신 돈을 갚아주려고까지 한다. 이후 밤길을 거닐던 아버지가 다짜고짜 피터의 집을 찾은 후 들어앉아 아내와 아들, 심지어 아들의 여자 친구와 조금씩 친밀해져 가지만 그런 상황의 매순간 피터는 분노조절장애가 아닐까 싶을 만큼 아버지에게 반응한다.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방법>은 ‘인간적'이다. 그리고 '가족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적이라는 단어는 우리는 흔히 말하는 그 인간미라던가, 휴머니즘의 그 인간적이 아니다.

가족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단위이지만, 가족만큼 '데면데면'한 사이가 있을까. 바로 그 세상에 둘도 없이 데면데면한 사이인 그 가족의 '인간미'. 그럼에도 가족이라서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애증을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은 은유법처럼 풀어놓는다.

할 줄 아는 게 보드게임밖에 없는 아버지. 아들이 떠나간 그날도 아버지는 보드게임을 했다. 여전히 그 시절 아들의 얼굴이 담긴 실종 전단지를 붙이고 다니지만, 막상 아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 보드게임으로 상징되었지만, 많은 아빠들이 그러지 않을까? 뜬금없이 자식 자랑을 하고 어릴 적 집 나간 아들을 놓지 못하지만, 막상 그 아들들에 대해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다. 여전히 눈치 없는 소리만 하고, 자기 멋대로이다.

아들은 다를까. 어릴 적 넉넉지 않은 형편에 늘 짝퉁만 사왔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켜켜이 쌓인 듯한 아들. 그럼에도 여전히 보드게임만 하는 아버지를 참을 수 없는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다르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형의 실종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애증의 공동체.

행복의 단추는 어떻게?

영화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 스틸 이미지

이 평행선 같은 아버지와 아들은 어떻게 다시 행복의 단추를 채우게 되었을까? 결국 그 해법은 서로가 그어놓은 선에서 한 발씩 들어서는 것이다. 큰아들만 찾으러 다니던 아버지. 그래서 그 아들이 떠난 날부터 매일 밤거리를 헤맬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오랜 배회 끝에 아들 집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 해프닝은 뜻밖에 서먹서먹했던 아들 집 가정의 청신호로 작용한다.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방에 형의 전단지를 붙여놓은 채 칩거한 아버지를 찾은 아들은 비로소 속내를 펼친다. 아버지도 안다. 불평불만만 늘어놓던 그 아들은 누구보다 아버지의 안타까움을 제일 잘, 오래 지켜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들이 바라는 건 별 게 아니다. 형이 떠난 그 날부터 아버지의 곁에 있었던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가족으로서의 소박한 소망뿐이다. 그 별 것 아닌 소망을 솔직하게 터놓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은 풀기 어려운 난제에 다가가는 구비구비 오솔길 같은 영화다. 다시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들먹일 수밖에 없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사연이 없는 집이 어디 있으랴. 오랫동안 양복점을 해왔던 할아버지는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손주에게 양복 한 벌을 선사하며 멋쟁이의 팁을 전수한다. 양복 단추를 전부 잠그지 않는 것. 행복도 마찬가지 아닐까. 완벽한 방법은 양복의 단추 하나를 열어놓듯 서로에 대한 마음과 태도를 한 자락 열어놓는 것이다. 그래야 비슷하게나마 행복의 문이 열린다. 결국 단추를 채우는 게 아니라 열어놓는 것. 이게 영화가 제시한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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