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눈 앞에서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작년에 만주의 여순감옥에 가서 독립군 학살기구를 보았었는데 아직까지도 소름이 끼친다. 시체를 거꾸로 눕혀서 가루로 만들고, 태워죽이고 찢어죽이는 기구였다. 이는 백선엽 장군이 속했던 만주국 군인들이 독립군들을 죽일 때 사용했던 것이었다…."

9일 오전 깊게 패인 주름, 약간은 굽어진 허리, 백발이 성성한 이들 수십여명이 서울 여의도 KBS 본관 계단 앞에 모여들었다. 깊은 분노를 담은 눈으로.

이들은 KBS의 이승만, 백선엽 미화 다큐에 대해 강하게 분노하며 '친일·독재 찬양방송 저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 항일독립운동단체, 4.19 혁명 단체, 6.25 민간인 희생자 유족단체 소속 회원들.

▲ 4월혁명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등 총 33개의 항일독립운동단체, 4.19혁명 단체, 6.25 민간인 희생자 유족단체, 언론단체로 구성된 '친일.독재 찬양 방송 저지 비상대책위원회'는 9일 오전 기자회견 개최뒤 KBS 항의방문을 시도했으나 청경들에게 가로막혀 30여분 간 본관 계단 앞 땅바닥에 앉아 연좌농성을 진행해야 했다. ⓒ곽상아
몇 년간 KBS를 출입하며 KBS본관 앞에서 열린 각종 기자회견, 집회, 문화제에 가보았으나 이번은 좀 '달랐다'. 집회 주체의 연령대, 쏟아지는 근현대사 관련 발언들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졌다. 별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발언을 써내려 가던 도중, 나는 한 할머니가 내뱉은 한 문장을 듣고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얼얼해졌다.

"당신들은 눈 앞에서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이들이 기자회견을 끝낸 직후 김인규 KBS사장에게 기자회견문을 전달하겠다며 KBS 본관 출입을 시도하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을 가로막은 KBS 청경들. "이렇게 문전박대할 수 있느냐"며 항의하던 도중, 한 할머니가 청경들을 향해 내뱉은 한 마디였다. 바로 내 옆에 서서 청경들을 향해 절규하던 할머니의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는데, 그게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아무런 의미없는 습기일 뿐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랬다. '친일, 독재 찬양방송 저지 투쟁'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본질은 '너무도 소중한 내 아버지를 죽인 학살자가 수십년 뒤에 영웅으로 둔갑하는 기막힌 현실'에 대한 가슴속 깊은 분노였다. 그것은 거대한 역사적 당위라기 보다 시대에 휩쓸렸던 수많은 개인들의 너무도 현실적인 체감이었던 것이다. 습관적으로 써내려 가던 발언들의 무게를 새삼 느끼며, 깊은 고민 없이 기사를 써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에 나는 한동안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일까. 아니면 딱딱한 주제라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KBS의 이승만, 백선엽 미화 다큐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분노가 예상만큼(?) 크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난해 10월 할로윈 당시 '유관순 열사' '유준근 열사' 코스프레를 하며 이들을 희화하시킨 '비호감' 연예인 옥주현에 대한 네티즌들의 분노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공영방송 KBS가 국민의 전파를 이용해 독재자, 친일파를 대놓고 미화하겠다고 나서고, 반발하는 여론에 대해서는 '공과를 균형감있게 다루겠다'는 립서비스만을 하기 바쁜 상황이지만 KBS에 쏟아지는 비판은 '무개념 옥주현'에 쏟아지는 관심과 비판에 비해 미미하기 짝이 없다.

옥주현의 트위터 글에 대해 쏟아진 비판의 핵심인 '우리민족을 위해 죽어간 열사들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은 KBS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사안의 심각성은 유관순 코스프레와 비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국민의 전파를 이용해 독재자와 친일파를 미화하겠다는 공영방송사와 한 연예인의 무개념 트위터 질. 둘 중 이 사회에 더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관순 코스프레에 대한 비판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존경에 근거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관심의 눈을 KBS 이승만, 백선엽 다큐로 돌려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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