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후배들과 장국영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중 한 명이 TV프로그램에서 장국영의 유서를 본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유서 내용이 뭐였냐고 눙치며 물으니 후배는 ‘세상피곤이었던 거 같은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내용에 큰 차이는 없지만 해시태그 같아서 현실웃음이 터졌다. 멀지 않은 미래에 해시태그 유언이 유행할 거 같기도 한데 2003년이라 생각하면 상당히 급진적인 상상력이다.
感情所困無心戀愛世(감정소곤무심연애세). 장국영 유서의 정확한 내용이다. 해석하자면 ‘마음이 피곤하여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의미다. 누가 시켜서 유서를 쓰지도 않을 텐데 마지막 흔적에도 사랑과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게 장국영답다.
왕가위 감독 경력의 하이라이트 장국영
청소년 시기의 나는 장국영을 조연배우로 기억했다. 처음 만난 작품인 <천녀유혼>, <영웅본색>의 탓이 컸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처녀귀신’의 젖은 몸이나 몰래 훔쳐보던 찌질한 백면서생, ‘따거(兄)’들의 깊은 뜻을 모르고 설레발치다 일을 그르치는 철부지 초보경찰.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캐릭터인데 아시아를 대표하는 슈퍼스타가 맡았다는 게 지금도 약간 이질감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현실의 장국영은 홍콩에서 가장 용감한 배우였다. 그의 성적 취향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언론을 향해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에피소드는 지금도 회자된다. 당시의 홍콩은 물론이고, 2020년인 지금도 어느 나라에서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장국영은 퀴어무비인 <해피 투게더>를 찍고 영화제작 발표를 위해 연 기자회견에서는 함께 주연을 맡은 배우 양조위와 탱고를 춘다.
실제로 장국영은 스태프와 지인들에게도 누구보다 친절한 인격자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까지 3편의 영화에 장국영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왕가위 감독은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로맨틱한 사람이었거든요. 동시에 사려 깊고 늘 다른 사람을 챙기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우린 격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아비정전>을 찍고 제가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던 그때, 꿋꿋이 저를 지지해준 사람입니다. 그와 함께 일했던 기억은 제 경력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합니다.” (『왕가위』, 씨네21북스, 215p)
그러나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짙다. 등장하는 동시에 주변이 환해진다던 장국영의 선한 밝음 뒤에는 늘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던 거 같다. 지인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부유한 집에서 막내아들로 자랐지만 너무 바쁜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탓에 생긴 뿌리 깊은 애정 결핍. 유명세를 먹이로 삼은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가 우울증 악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자유롭고 정직하고 단순한 삶을 살고자 했던 그에겐 떨치기 힘든 부담이지 않았을까.
다른 빛깔로 타오르는 하나의 불꽃 장국영
我就是我 是颜色不一样的烟火
나는 그저 나일뿐 다른 빛깔로 타오르는 하나의 불꽃
天空海阔 要做最坚强的泡沫
하늘은 그 끝이 없고 바다는 드넓으니 가장 강력한 포말을 일으킬 거야
我喜欢我 让蔷薇开出一种结果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한 송이 장미꽃을 피움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거야
孤独的沙漠里 一样盛放的赤裸裸
고독한 사막에 만개한 한송이 꽃처럼 있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드러낼 거야
2000년 발표된 앨범 [大热] 수록곡이자 본인이 직접 노랫말을 쓴 곡 ‘아(我)’의 가사 일부다. 장국영의 작품을 접하면 접할수록 가사처럼 대체불가한 빛깔로 타오르는 배우라고 자연스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작만 살펴봐도 강렬한 빛깔로 주변을 압도하는 타오르는 명배우 장국영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유덕화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톱스타였지만 <아비정전>에서만큼은 이름 없는 ‘경찰관’으로 출연한다. <동사서독>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고비사막 같은 건조한 매력을 자랑하지만 서독 구양봉의 절대고독은 동사 황약사(양가휘), 북개 홍칠공(장학우). 훗날의 동방불패(임청하)를 가뿐히 압도한다. <해피 투게더>에서는 세상의 끝 아르헨티나까지 뻗치는 퇴폐적인 매력으로 양조위(아휘役)조차 지고지순한 순정파로 만든다. <패왕별희>에선 끝내 만인지적의 초패왕을 무릎 꿇리고 눈물을 떨어뜨리게 하는 전설의 우미인이 되었다.
BTV <영화당-장국영 추모 특집>에서 김중혁 작가는 요절 후 금세 잊히는 스타들 사이에서 유독 장국영의 추모가 꾸준한 이유에 대해 “우리 속의 아프고 약하고 작았던 마음들을 대변했는데 그 마음이 다치고 훼손된 거 같아서”라고 말했는데, 발 없는 새가 영원한 안식처로 날갯짓한 지 열여덟 해가 지나도 그리움의 농도가 쉽게 옅어지지 않는 이유도 사막에 핀 고독한 한송이 꽃을 지키지 못한 뒤늦은 후회 탓이기도 할 것이다. 2003년의 그날처럼 마스크가 세상을 뒤덮은 오늘. 다시 한 번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