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강남규 칼럼] 대한민국에는 선상투표제도라는 게 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있어 투표에 참여할 수 없는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배 위에서 팩스로 투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2005년 원양어선 선원들이 선상 유권자들에 대한 투표권이 보장되지 않는 것에 대해 헌법소원을 냈고, 헌법재판소가 2007년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리며 도입됐다.

판결 요지는 명료했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얘기다. “선거권은 국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한 헌법상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권리로서 … 일반인에 대한 선거권의 제한은 불가피한 예외적 사유가 존재할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정부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유권자의 선거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 선거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나라는 국민주권의 원리를 무너뜨린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선상투표자가 많지는 않다. 참여율이 아주 높은 것도 아니다. 제20대 총선을 기준으로 보면 전체 대상자는 약 1만 명, 그중 28% 정도가 선상투표 의사를 신고했다. 실제로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2,611명이었다. 제20대 총선 전체 투표자가 약 2,400만 명이었으니, 선상투표가 미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투표의 영향력이 아니라 투표를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3천 명이 채 되지 않는 유권자의 선거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선상투표제도라는 별도의 제도를 도입했다. 선거권을 보장하는 것은 그만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코로나19 영향 4ㆍ15총선 재외선거 차질 (PG) Ⓒ연합뉴스

헌법재판소가 선상투표제의 단초가 된 판결을 내린 날, 또 하나의 판결이 있었다.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제한하고 있는 공직선거법이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것.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판결 요지를 밝혔다. “선거권의 제한은 그 제한을 불가피하게 요청하는 개별적, 구체적 사유가 존재함이 명백할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 국가의 노력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기술상의 어려움이나 장애 등의 사유로는 그 제한이 정당화될 수 없다.” 선상투표 판결과 거의 동일한 취지다.

그렇게 보장된 재외국민의 선거권이 13년 만에 다시 제한되고 있다. 코로나19가 원인이다. 세계 각국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자가격리 권장, 외출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하고 직항 노선 중단으로 투표함 회송이 어려워졌다. 그러자 미국을 필두로 한 40개국의 65개 공관에서 재외선거사무를 중단했다. 이에 따라 재외 선거인 약 8만5천 명이 이번 선거에 참여하기 어렵게 됐다고 한다. 전체 재외 선거인 신고자의 거의 절반(46.8%)에 해당하는 수다. 절대 적은 수가 아닌데, 역시 숫자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유권자의 선거권 행사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또 선거권이 제한되는 유권자들이 있다. 3월 31일부터 증상이 의심되어 2주간 자가격리에 들어가거나 확진 판정을 받게 되는 사람들이다. 투표소에 방문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거소투표자 접수가 3월 30일로 마감됨에 따라, 앞으로 격리되는 유권자들은 투표소 방문도, 거소투표도 할 수 없게 된다. 자가격리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감염병 예방법에 따른 법적 조치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결국 국가에 의해 선거권을 제한받는 상황이다.

결코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문제들이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반응들은 지나치게 가벼워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이재준 고양시장은 재외국민 투표를 중단하고 그 예산으로 내국민들에게 ‘위기극복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놨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또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어쩌겠나’ 정도로 요약되는 논평을 내놨고, 미래통합당은 정치적인 결정 아니냐는 음모론이나 내놓고 있다. 포털 댓글에서는 안타깝지만 이번엔 쉬라는 말들이 베스트 댓글에 오르는 상황이다.

독일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펼쳐지는 '재외국민 투표권 보장 릴레이' 캠페인 사진 [베를린=연합뉴스]

하지만 선거권 문제는 이렇게 가볍게 다룰 이야기가 아니다. 단순한 행정의 문제가 아닌 국가의 의무에 대한 이야기이며, 민주주의의 근간에 대한 이야기다. 헌법재판소가 2007년 판결한 것처럼 선거권이 “국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한 헌법상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권리”이고 “국가의 노력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기술상의 어려움이나 장애 등의 사유로는 그 제한이 정당화될 수 없다”면, 그에 걸맞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국가가 그만한 노력을 취한 적이 있는지 물을 일이다. 일정을 바꾸는 데 따르는 비용과 혼란이 두려워 지금껏 쉬쉬하다가 “이제 와서 연기를 말하기엔 너무 늦었다”(4월 1일자 한국일보, <개학 이어 총선도 연기? 청와대 “회의적”>, 여당 핵심 관계자 인용)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