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작년 9월 ‘케이팝 산업과 아이돌의 열애설’이란 글로 이 지면에 처음 글을 실었다. 저 글의 본론 부분엔 “온전한 팬덤 산업으로 재편되어 가는 케이팝의 현주소”라는 문장이 있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저 문장에 축약된 생각을 풀어쓰고 이어가며 매주 글을 써왔던 것 같다. 그동안 글을 쓰며 꾸준히 이야기한 키워드를 가려보면 “케이팝” “뉴미디어” “저출산 고령화” “대중문화의 소실” “엔터테인먼트의 팬덤 산업화”이다. 이런 사회적 현상과 문화적 키워드들이 어떻게 문화 산업과 작용하고 있는지, 그래서 문화 산업이 어떤 현상을 낳았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케이팝을 중심으로 자문자답을 던졌다. 그동안 스스로 던졌던 문답을 한 편의 글로 정리해 남겨 보려 한다.

본론부터 말하면, 대중문화 시장은 분화되고 서브컬처화 되어 간다. 대중문화는 매스미디어 시대의 산물이다. 과거에는 몇 가지 종류의 거대 미디어만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소수의 미디어를 통해 같은 뉴스를 듣고 같은 드라마를 보고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영화를 봤다. 저마다 취향과 유행과 관심사의 동질성을 가졌으며, 미디어는 사람들을 단일한 계통의 커다란 군중, ‘대중’으로 의식화하고 조직화했다.

2010년대 이후 본격화된 뉴미디어의 시대는 군중의 동질성을 분해했다. 케이블 TV와 종편은 물론,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일상화를 통해 무수한 미디어가 난립했다. 미디어가 분화되며 사람들의 관심사도 분화됐다. 미디어가 군중을 하나로 묶어주던 매스미디어 시대의 공통된 관심사가 더는 형성되기 어렵다. 사람들은 취향과 나이, 성향에 따라 제각각 다른 분야의 콘텐츠를 소비한다.

유튜브 로고 이미지

과거에는 공중파가 여러 주제와 장르의 콘텐츠를 통합하는 플랫폼이었다면 뉴미디어는 그것들을 각각의 특화된 채널로 안치했다. 시청자들은 대중으로서의 경험을 나누지 못한 채 미디어의 원룸에 들어가 있다. 유튜브는 미디어와 관심사의 분화를 주도하고 집약하는 플랫폼이다. TV는 리모컨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으면 프로그램이 차례로 방영되는 수동적 매체지만, 유튜브는 직접 영상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축적된 ‘취향’에 따라 맞춤형으로 영상이 선별돼 소개받는 능동성과 수동성이 혼합된 매체다. 아이돌, 뷰티, 힙합, 패션, 게임, 요리, 축구, '먹방', '인방'… 유튜브 채널은 플라나리아처럼 인수분해되었다. 매스미디어의 시대가 가고 일인 미디어의 시대가 왔고, 미디어 소비를 통해 형성되는 사회적 주체도 쪼개지는 것이다.

문화 산업 전반이 분화되고 있으며 문화 시장 소비자들이 분화되고 있다. 각각의 문화 산업이 특정한 취향에 특화된 이들이 모이는 외부에 대한 개방성이 닫혀가는 장소, 팬덤형 산업이 되는 것이다. 힙합이면 힙합, 아이돌이면 아이돌, 게임이면 게임, 스포츠면 스포츠 등 분야를 막론한다. 이런 세부 분야들은 원래부터 마니아층이 따로 있었다. 다만 마니아층은 소수였고, 그냥 소수로 끝나거나, 그 밑변에 얕은 관심사를 지닌 라이트 팬이 더 많은 숫자로 깔려있는 ‘대중성’을 지닌 것이다. 하위문화가 대중문화와 분리된 게토, 혹은 열성 팬덤이 주축이 된 채 대중문화 내부에 포섭된 문화로 소비되었다면, 지금은 대중문화 자체가 몇 단위의 하위문화로 분절되고 느슨하게 연결된 상태라는 인상이 든다. 뉴미디어의 범람에 따라 올드미디어의 역할이 연결고리로 한정되어 뉴미디어에서 제기되는 이슈를 포섭하게 된 미디어 지형의 재편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대중과 마니아 사이 걸쳐있는 이들, 깊이 있는 취향을 가졌다고 하기엔 가볍지만 비주류 문화를 즐긴다는 자의식을 가진 이들이 나타났고, 이런 이들을 부르기 위해 나타난 유행어가 '덕후' 혹은 '더쿠'(오타쿠의 어감을 라이트하게 조탁한 버전)인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발견되는 것이 취향의 소수자 의식의 '대중화'다. 축구 힙합 아이돌 등 하위문화 커뮤니티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서는 '대중'에 대한 저항 심리와 그들에 대해 자신을 구분 짓는 자의식이다. 내가 파는 분야를 알지도 못하는 '대중'이 내 문화를 함부로 재단한다는 반발 심리를 드러내고 마이너란 정체성이 주는 특별한 기분에 취한다. 혹은 메이저에 들지 못하는 나/너를 향한 자조와 깔아뭉개기의 정서다. 국내 힙합 팬덤을 칭하는 ‘힙찔이’, 아이돌 팬덤을 겨냥하는 ‘육수’ ‘십덕’ 같은 멸칭이 후자의 사례다. 아이러니하다. 정작 '대중'이라는 대상이 존재하는지 자체가 의심스러워진 현실이니 말이다. 아이돌 팬덤끼리 일반 커뮤니티에서 벌이는 여론전을 보면 이 아이러니가 웃지 못하게 재현되고 있다. 누군가 ‘대중’을 자칭하며 특정 아이돌 그룹과 팬덤을 ‘십덕’이라고 비난하지만, 지난 글 보기를 통해 정체를 까고 보니 그 역시 ‘십덕’이다. ‘십적십’(‘십덕’의 적은 ‘십덕’이다)이란 신조어가 탄생한 배경이라고 할까.

TV조선 트로트 가수 오디션 <내일은 미스터트롯>

문화 산업의 팬덤 산업화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최근에는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이 큰 흥행을 했는데, 이 흐름이 저출산 고령화와 맞물려 노년 세대까지 흘러갔다는 뜻이다. 어떤 특수한 분야를 타게팅해 특정한 다수의 참여를 끌어내고 몰입감을 주입해 지속적인 팬덤 시장을 바라볼 수 있는 문화적 기획은 앞으로 끊이지 않고 또 다른 모습으로 시도될 가능성이 크다. 바꿔 말하면, 전 세대 계층의 문화 소비 주체화 및 팬덤화, 나아가서 전 국민의 ‘덕후화’라는 미래가 그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상은 단순히 새로운 기회의 장이 열렸다고 평가하기 힘든 현상이다. 미디어 생태계의 밑바닥에 깔린 지층이 움직인 것이며, 미디어에 관계된 모든 주체가 생존을 위해 적응하거나 이끌려 갈 수밖에 없는 변화다. 올드미디어의 종사자들, 올드미디어의 수혜를 입던 이들에겐 위기일 것이고, 그 바깥의 주체들에겐 기회일 것이며, 누군가는 변화를 더 일찍 감지하고 앞서 나갔다. 케이팝을 예로 들자면, 아이돌 기획사들은 근본적인 기능이 변화했다. 트레이닝-프로듀싱-매니지먼트에 집중하고 그렇게 내놓은 가수를 미디어에 의뢰해 홍보를 하던 입장에서, 뉴미디어를 직접 운영하며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하고 아이돌 활동에 관한 모든 사항을 관장하는 컨트롤 타워가 되었다. 이런 기획 시스템의 분화와 맞물려 케이팝의 팬덤 산업화가 가속화된 것이다.

각각의 문화가 분립된다는 것은 각각의 문화가 폐쇄화된다는 뜻과 멀지 않다. 케이팝 산업은 팬덤 산업화 이후, 충성심 강한 소비자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그 바깥의 영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그와 함께, ‘케이팝 산업과 아이돌의 열애설’에서 길게 풀어 쓴 유사 연애 세일즈 강화, 팬들을 상대로 한 아이돌의 접객 서비스, 감정 노동 강화도 일어났다. 보이그룹과 걸그룹의 팬덤 시장 규모는 걸그룹이 압도적으로 열세다. 때문에 걸그룹은 매스미디어를 무대로 대중성에 강점이 있는 활동을 해 왔다. 최근엔 아이즈원이 특급 보이그룹 수준으로 앨범을 파는 기염을 토했고, 걸그룹 팬덤 시장도 성장하는 추세지만, 대다수 중소 기획사 걸그룹은 한정된 팬덤 시장 파이에서 수익성 있는 규모의 팬덤을 쟁취하기 힘들다. 그들을 세상에 소개해 줄 수 있는 매스미디어가 약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상의 변화는 보이그룹보다 걸그룹에게 한층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시장 내부의 양극화는 더 커질 것이다. 팬덤에 특화된 기획 활동을 하면서도 그 바깥에 문호를 열어 둘 필요가 있다. 내부 생태계를 객관화해 산업의 건강함을 유지하고, 새로운 소비자 역시 유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말처럼 쉽게 실현될 수 있는 목표는 아닐 것 같다.

공통의 관심사가 흩어져 가는 시대의 미래가 모두의 ‘덕후화’라면, 과제는 상이한 관심사로 공동체에서 분절되는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공통의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것이다. 문화 산업 전반에서 팬덤 문화가 보편화되는 현상은 사람들이 강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작은 단위 공동체가 번성하며 삶에 다양성을 준다. 하지만 뒤집으면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공동체의 파편화에 흐름을 더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미디어 분화로 인한 공중파 시청률의 지속적 하락 속에 가장 시청률이 높은 공중파 예능이 <나 혼자 산다> 같은 1인 가구 관찰예능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저마다의 관심사가 갈라지고 남는 최후의 공통된 관심사가 저마다의 개인화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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