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처음으로 미국 국가가 북한 하늘에 울려 펴졌습니다.” (SBS <8뉴스>)
“북측과 미국, 양국의 국가가 처음으로 동시 연주되는 순간을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MBC <뉴스데스크>)
“26일 저녁 평양 한복판에 미국 국가(Star-Spangled Banner)가 최초로 울려 퍼졌다.” (조선일보 2월27일자 1면)

미국의 대표적인 교향악단인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평양에서 역사적인 첫 공연을 마친 것을 다룬 언론 보도 가운데 일부다.

▲ 26일 방송3사 메인뉴스. 왼쪽이 KBS <뉴스9> 중간이 MBC <뉴스데스크> 오른쪽이 SBS <8뉴스>.
하지만 언론 보도 내용 가운데 ‘사상 처음으로 미국 국가가 북한 하늘에 울려 퍼졌다’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지난 2005년 북한에서 이미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언론의 이 같은 보도는 오보인 셈이다.

2005년 6월28일 세계여자권투협의회(WBCF)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미국 국가 연주

북한에서 미국 국가가 ‘사상 최초’로 연주된 것은 지난 2005년 6월28일이다. 세계여자권투협의회(WBCF) 챔피언 타이틀전이 당시 북한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렸는데, 당시 체육관을 가득 메운 1만2천여 명의 관중들 앞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됐다. 당시 북한 여자 프로복싱 김광옥 선수와 미국의 이븐 카플스 선수가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 경기를 펼쳤고, 바로 이 때 미국 국가가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울려 퍼졌다. 국가만 울려 퍼진 게 아니라 성조기와 ‘북한 라운드걸’까지 등장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 2005년 7월19일 한겨레21 (568호).
“(2005년) 6월29일치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핵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조-미 대결전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의 정세 속에서 관람자들도 조선을 고립, 붕괴시키려는 미국과 일본에 대한 증오 감정이 꽉 들어차 있다’고 링 주변의 긴장된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이런 숨막히는 긴장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곧 사그라졌다. 잠시 뒤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미국 국가가 울려퍼졌다.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을 가득 메운 1만2천여명의 관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으로 보기 드문 모습이다. 북한 관람객들이 미국 국기에 대한 예의를 표시한 것이다 … 사회주의 혁명의 수도인 평양의 하늘 아래 성조기가 펄럭이고 국가가 울려퍼진 게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미국인이 직접 성조기를 들고 평양 땅에 들어간 것도 이례적이다.” <2005년 7월19일 한겨레21(568호)>

물론 이 같은 오보 때문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역사적인 평양 첫 공연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의미 이전에 ‘사실(Fact)'의 문제다. 언론에 대한 신뢰가 기본적인 사실관계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잘못된 건 고쳐야 한다. 방송3사 가운데 이를 제대로 보도한 곳은 KBS 정도이고 오늘자(27일) 아침신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상 최초’라고 보도했다. KBS의 경우 26일 <뉴스9>에서 “3년 만에, 평양 한복판에서 미국 국가가 또 힘차게 울려 퍼졌습니다”라고 정확히 보도했다. 오보를 냈으면 정정보도를 하는 것이 ‘책임 있는’ 자세다.

방송3사 가운데 KBS만 정확하게 보도…대다수 신문도 ‘사상 최초’로 보도

그렇다면 당시 북한은 왜 이례적으로 미국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를 해준 걸까. 당시 <한겨레21>이 보도한 내용을 보면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정치적 상황과 맥락이 닿아 있다. 보도의 일부를 인용한다.

▲ 동아일보 2월27일자 1면.
“평양 관중들은 이번 경기에서 성숙한 관중 매너를 보여주면서 지난 4월 평양에서 열린 2006년 독일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시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얻은 관중 난동 불명예를 씻어내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속뜻은 다른 데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 6월17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 일행을 만나서는 ‘내가 이제 부시 대통령 각하라고 부를까요? 우리가 부시 대통령 각하를 나쁘게 생각할 근거가 없다’며 공개적인 구애를 내보였다 … 김 위원장은 부시 행정부에게 ‘상응하는 매너’를 보여달라는 선명한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그리고 이번 평양에서 열린 WBCF 챔피언 타이틀전에서는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미국의 상징인 국기와 국가에 대한 존중의 뜻을 극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한 듯하다.”

당시 상황을 이번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 첫 공연에 단순 대입시키는 것은 무리겠지만 맥락적 상황은 유의미하게 살펴야 할 것 같다. ‘남북간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전’ 개최여부가 애국가 연주 등을 둘러싸고 불투명해지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면 (물론 이 또한 단순비교는 무리다)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지 대략 읽히기 때문이다.

물론 ‘카운터파트너인’ 미국의 입장은 아직 떨떠름하다. 전문가들과 많은 언론들이 “이번 공연이 핵 프로그램 신고 문제로 교착 상태에 빠진 북핵문제에 돌파구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라는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좀더 지켜보자. 김정일 위원장과 라이스 국무장관의 직접대화 기회는 사라졌지만 변수가 많은 게 북미관계이고 국제정세다.

그나저나 ‘오보’낸 언론사들, 반드시 정정보도 하도록 하자. 그게 책임 있는 자세다. 잊지 말자 정정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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