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사회적 격리의 시대, 인간이 인간에게 병리적 무기가 되어버린 시대다. 하룻밤 자고 나면 그 인간으로 인해, 그 인간을 숙주로 하는 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죽었다는 사실을 새삼, 재삼 확인하게 되는 시절이다. 그래서 국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경고하고, 나아가 처벌의 대상으로까지 삼는다. 이 시대를 견뎌야 하는 짐은 격리된 개인에게 고스란히 얹혀진다.

앞서 바로 이 '격리'에 대해 충격적으로 그려낸 영화가 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영화화한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올해 아카데미상 주요 후보에 올랐던 <두 교황>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2008년 만든 이 영화는 마치 2020년의 코로나 사태를 예견이라도 하듯, 하루아침에 온 도시를 덮친 정체 모를 백색 실명 사태를 묵시록적으로 그려낸다.

격리, 아니 방치된 사람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스틸이미지

질병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어제와 다를 것 없이 평범한 날 운전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눈이 멀었다. 다른 맹인들과 달리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안과에서도 처음 보는 질병, 하지만 그 남자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그 남자를 시작으로 그 남자의 차를 훔쳐 간 도둑, 그 남자를 치료한 의사 이런 식으로 '백색 실명'은 퍼져 나갔다.

듣도 보도 못한 질병에 대해 정부는 환자들을 격리하기로 결정했다. 정부 결정에 따라 격리될 장소로 떠나게 된 의사(마크 러팔로 분). 그의 아내(줄리안 무어 분)는 이제 막 눈이 멀어 혼자서는 그 무엇도 해내기 힘든 남편을 돕기 위해 스스로 눈이 멀었음을 자처하고 '격리'된다.

그러나 말이 격리지, 그건 백색 실명자들을 사회로부터 소거한 것이었다. 덩그러니 허름한 건물, 군인들은 그들을 데리고 가 그곳에 방치했다. 깨끗한 물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불결한 환경, 이제 갓 눈이 먼 사람들은 스스로 화장실조차 가기 힘들 정도로 제 한 몸 돌보기 힘든 상태다. 결국 안 그래도 더러운 환경, 복도 곳곳에 사람들이 만들어 낸 오염물 천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의사의 아내는 그런 난제들 사이에서 방치된 실명자들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써보지만, 그럴수록 '가장 두려운 건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는 대사처럼 상황은 갈수록 극으로 치닫는다.

'우리의 눈은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원작의 한 문장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시각의 대한 의존도가 높다. 원작자 주제 사라마구는 바로 그, 인간이 가장 의존하는 시각을 상실케 함으로써 '인간'을 묻는다. 즉 가장 인간다운 시각을 상실케 하여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묻는다.

인간다움에 대하여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스틸이미지

'우리가 쌓은 담이란 얼마나 허약한 것일까'(원작). 집단 격리의 상황은 곧 무정부 상태의 아노미를 불러온다. 떼거리로 건물에 갇힌 사람들이 그나마 제한된 조건에서 질서 있게 생활하기 위해서는 합의된 룰과 원칙을 합의하고 지켜나가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먹는 것'의 평화마저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 아니 결국 그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부메랑이 되어 격리된 사람들의 목을 조른다.

상황을 더욱 극단으로 몰아가는 건 격리된 그들을 지키는 줄 알았는데 발포를 불사하며 '적대시'하는 군인들이다. 눈이 안 보여 대열에서 빠져나온 사람, 썩어가는 발을 참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 모두 결국 총성의 희생자가 되었다. 국가의 시민이 하루아침에 발포의 대상이 되는 공포스러운 '역전'은 그 누구라도 위협이 될 시에는 바로 적이 될 수 있는, 보호자를 자처해온 '권력'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민낯을 드러내 보인 건 국가라는 시스템만이 아니다. 시스템에서 튕겨 나온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부족한 식량을 어떻게든 공평하게 나눠 가지려 애쓰던 사람들. 그런데 갑자기 3번 방에서 총을 든 한 사람이 그 총을 앞세워 식량을 독점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단지 총 한 자루라는 무력 앞에 무기력해진다. 순순히 가지고 있던 귀금속을 거둬 바치고, 그것이 떨어지자 '여자'를 공급하라는 주문에 자신들이 머무는 방의 여자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보낸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스틸이미지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격리된 그 순간부터 사람들을 몰아가는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그들을 시험에 들게 만드는 인간다움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동시에 인간다움마저 잃은 듯 행동한다. 배고픔 앞에서, 겨우 한 자루의 권총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에서 그간 눈이 안 보여왔던 '맹인'은 상대적 우위를 점한다. 영화엔 두 맹인이 등장한다. 그중 한 명은 보이지 않지만 보일 정도로 능숙해진 맹인의 생활을 총을 든 남자의 권력을 '보좌'하는 데 이용한다. 그런 맹인에게 의사의 아내는 인간을 묻는다. '조금씩 양보하다 보면 결국은 상실하게 되고 마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안다'(원작). 도대체 눈도 안 보이고, 정부마저 버리다시피하여 격리된 사람들에게 '인간다움'을 '인간의 존엄'을 운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겠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를 참혹하게 그려낸다. 복도에 즐비한 배설물, 그걸 밟고 오가는 나신의 사람들, 그 한구석에서 뒤엉킨 남녀, 그리고 배고픔 앞에서 한없이 비겁해지고 마는 남성들. 심지어 그 총 한 자루의 악이 제거된 상황에서조차 사람들은 떨쳐 일어서기보다 협잡을 먼저 떠올릴 정도로 '인간'의 경계는 무너진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스틸이미지

그리고 외국의 한 슈퍼마켓에서 휴지 한 롤을 가지고 두 여성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혈투를 벌였다는 외신은 그 참혹함이 우리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실감케 한다. 반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감염자들로 인해 전 사회가 멘붕에 빠졌지만, 마스크 한 장을 구하기 위해 몇 시간을 참으며 길게 줄을 선 사람들, 부족한 병원 시스템에 자가격리를 하며 인내하는 대구 시민들, 희생과 봉사의 대명사가 된 의료진, 그들을 보면 그래도 아직 우리 사회 인간 존엄의 경계는 건재하다는 '감사'를 역설적으로 느끼게 된다.

길어진 사회적 거리두기에 지친 즈음, <눈먼 자들의 도시>는 경계가 풀려버린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게 만들어 준다. 드디어 모두가 시력을 되찾은 후, 그때서야 하늘을 바라본 주인공은 자신에게 묻는다. '계속 살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답은 필요하다고 해서 꼭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답은 답을 기다려 보는 것일 경우가 많다'고 답한다.

코로나19 시대를 견뎌 가야 하는 우리 삶의 답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의사의 아내가 그럼에도 견뎌내며 자신과 남편 그리고 주변의 삶을 인도했듯이, 눈 밝은 그녀처럼 ‘존엄'의 정신을 놓치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이 시대를 건널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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