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저축은행 사태'가 대형 측근 게이트로 확산되고 있다. 대통령의 '탈당'을 떠올리는 이도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역대 정권은 모두 임기 4년차에 터진 비리 사건을 기점으로 대통령의 탈당이 감행됐다. 노태우 정부에선 수서 택지 비리와 제2 이동통신 선정 비리가 계기였고, 김영삼 정부때는 한보비리, 김대중 정부는 '진승현·이용호 게이트'가 대통령 탈당의 촉매가 됐다.

구속된 은진수 감사위원은 지난 대선에서 BBK 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은 감사위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예민한 쟁점을 다뤘던 셈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인물의 역할은 같다.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권력의 생리상 이 인물을 쳐내기란 쉽지 않다.

은 감사위원에 이어 소망교회 장로 출신이 로비스트로 활동했단 주장이 제기됐다. 이와 함께 청와대의 핵심 멤버라고 할 권재진 민정수석, 정진석 정무수석, 김두우 기획관리실장의 이름이 줄줄이 거론되고 있다. 이들은 '핵심 관계자' 또는 '고위 관계자'란 익명을 써도 무방한 이들이다. "오만 군데서 청탁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김황식 국무총리 역시 책임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청와대 입장에선 그야말로 난국이다. 비빌 언덕도 기댈 곳도 보이지 않는다. 4.27 재보선 패배 이후 이제야 겨우 '불안한 안정'을 찾고 있는 한나라당이 이번 사태를 방어할 순 없다. 설령, 그럴 힘이 있다해도 임기 말엔 그러지 않는다. 가뜩이나 '대통령과의 결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제법 세를 이룬 한나라당이다. 이번 사건의 추이에 따라 생각보다 빨리 급속한 붕괴가 이뤄질 수 있다.

필연적이다. 비리를 저지른 권력에 관대한 민심은 없다. 제 아무리 잘 나가는 정치인이라도 민심의 향방에 따라 흔들리는 얄팍한 존재일 뿐이다. 이번 사건을 함께 수습하고 다음을 도모하자고 다독이기엔 선거가 너무 코앞이다. 이명박 정부와 함께 자신의 정치 인생도 소멸되길 바라는 현직 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평행이론이랄까. 임기 말 측근비리가 터지고, 여당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의 반복이다. 내용과 시기 모두에서 판박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민자당 대표와 갈등을 겪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소통령'이라고 불리던 아들 김현철의 구속된 이후 이회창 대표와의 힘겨루기에서 패배했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이인제 대세론에 편승한 정권 실세들의 실책으로 어색해진 노무현 후보와의 관계를 임기가 끝난 후에야 회복할 수 있었다. 청와대가 부랴부랴 박근혜 의원과 회동을 잡은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판세는 기울었다는 것이 주된 관측이다. 청와대는 주도권을 잃었고, 박 의원은 청와대에 아쉬울 게 없다.

▲ 31일자 방송 3사는 부산저축은행 사태 관련 보도를 하며, 청와대와 야당이 몸통 공방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주요한 꼭지로 편성했다.
그래서일까. 청와대는 정치적 중립의 시비를 감수하면서 '도발'을 일으키고 있다. 1차적 겨냥점은 박지원 의원이다. 박 의원을 타깃으로 그 배경에는 호남 기득권 전체를 때릴 수 있단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민주당의 본류를 칠 수도 있다는 제스처다. 같이 죽자는 일종의 물귀신 작전인데, 최소한의 반등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필사적 움직임이다. 어제, 오늘 청와대발 기사에는 익명의 '고위관계자'와 '핵심관계자'가 난무하고 있다.

여론이 흐르는 대로 저축은행 사태가 확산되도록 방치하지 않겠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는 걸 그냥 두고 보지 않겠다는 본능적 저항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이 저항이 성공할 수 있을까? 당장에 언론의 프레임을 헝크는 데는 성공한 모양새다. 어제(31일) 방송뉴스는 저축은행 사태를 둘러싼 청와대와 야당의 공방을 주요한 아이템으로 잡았다. 조중동 역시 청와대의 신호를 인지하곤 저축은행 사태의 배후로 '참여정부'를 지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이런 공세는 공허하다. 박지원 의원 측이 지난 1월 목포 지역의 저축은행 구명을 위해 청와대에 로비를 했단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 믿기지가 않는다. 청와대는 야당의 원내대표가 청와대에게 이런 비상식적인 로비를 했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믿음이 갈 만한 증거를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역 정치인들 중에 가장 수읽기에 밝다는 평을 듣는 박 의원이다. 그런 무모한 일을 벌였다는 것이 또한 난센스다. 박 의원은 "한번 해보자"는 반응을 보이며, 작심한 듯 추가 내용을 폭로했다. 정진석 정무수석이 자주 들락거렸다는 역삼동 식당까지 공개했다. 사건으로 사건을 덮고자 했던 청와대의 언론 플레이가 채 하루를 버티지 못하는 모양새다. 설령, 청와대의 주장에 일부 진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만약, 박 의원이 그런 청탁을 했다면 청와대는 즉각 거절하고 사실을 알렸어야 옳다. 지금이라도 수사 의뢰를 하면 된다.

청와대는 정치적 공방을 주업으로 하는 정당이 아니다. 청와대의 정파성이 무엇이든 간에 국가를 운영하는 조직이고,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역할을 맡은 기관이다. 권력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꼼수로 유지되지 않는다. 세상이 모두 그걸 아는데, 청와대만 그걸 모르고 언론 역시 알면서 모르는 척 해주고 있다.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의 유일한 국정 기조가 '참여정부 타령'이냐고 힐난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예전에 대국민캠페인차원에서 시행되던 것 중에 '내 탓이오'라고 적힌 차량용 스티커가 있었다. 청와대 관용차에 그 낡은 스티커를 다시 붙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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