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이라 불리는 5월, 유달리 살인 뉴스가 눈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냄새난다며 50대 노모를 패 죽인 아들, 자기 엄마를 안 모신다며 올케언니를 찔러 죽인 시누이, 말다툼 끝에 시어머니를 흉기로 찌른 며느리의 이야기까지, 하나 같이 충격적인 사건들이었죠. 이런 뉴스를 접할 때면, 보통 두 가지 반응이 먼저 나옵니다. 하나는 가해자가 분명 정신병자 아님 미친놈이랄 것이란 비난. 제 정신이 아니고서는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못할 것이라는 거죠. 두 번째는 재수 없게 내가 피해자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두 반응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난 적어도 폭력과 무관한 사람이란 사실.

▲ 재혼 1년만에 이혼소송 중이던 아내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는 대학교수 강모씨가 24일 부산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부산 북부경찰서로 돌아오면서 기자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육하원칙에 따라 작성된 기사는 사건을 철저히 타자화합니다. 그래서 기사 속 가해자들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더 엄밀히 말하면 비정상적인 사람들)이라 판단하게 됩니다. 가해자를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분류하고 나면, 기사 속 사건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죠. 내가 구축한 삶은 정상인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김훈은 기사의 육하원칙이 인간의 진실을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트레이트 기사 쓰는 일을 그만두고, 사건의 실체를 깊이 파헤치는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분명 기사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찔렀다는 현상의 진술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훨씬 더 복잡한 서사로 이뤄져 있습니다. 살인 사건의 이면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평소 관계, 시어머니의 성격, 남편의 행동, 며느리가 겪은 고통 등의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시어머니를 찌른 며느리의 사연이 좀 더 입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전 그 사건 이면의 이야기를 전혀 모릅니다. 다만 모든 사건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깊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죠. 다시 말해, 며느리에겐 시어머니를 찌를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게 폭력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 ⓒ폭력의 역사
이야기는 타자화된 사건을 내가 사는 세상 속으로 옮겨놓습니다.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저지른 사람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되는 거죠.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딜레마적 상황을 이야기로 듣다보면, 나도 폭력과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폭력 행위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안의 이야기라면 폭력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의 형태는 달라집니다. 내가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은 폭력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만듭니다. 반면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은 폭력을 나와 함께 숨 쉬는 존재로 만들고요. 폭력이 먼 곳이 아닌,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은 폭력의 공포를 극대화합니다. 때문에 누구든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은, 폭력이 주는 가장 큰 공포입니다. 폭력은 결코 비정상인의 세상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상인의 세계에도 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폭력입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우리 주변의 폭력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연출한 영화, <폭력의 역사>는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데요. ‘폭력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계속 이어져왔는가?’ (물론 답을 해주진 않습니다.) 가정적인 남자 톰은 영화 속에서 딱 세 번의 폭력을 행사합니다. 한 번은 가게에 강도가 난입했을 때. 강도가 종업원을 강간하려하자, 톰은 강도들을 폭력으로 제압합니다. (영화는 폭력의 잔인한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는데요. 여기서 톰은 총으로 상대방의 얼굴에 구멍을 만들어 놓습니다.) 두 번째는 집으로 전직 갱이 찾아 왔을 때. 톰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마찬가지로 갱을 잔혹하게 두들겨 팹니다. 끝으로 형에게 용서를 빌러 갔을 때. 하지만 형은 오히려 찾아온 동생을 죽이려했고, 이에 톰은 형의 머리통에 구멍은 만들어 버립니다.

톰이 행사한 세 번의 폭력은 모두 정당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행사한 ‘선의의 폭력’이었죠. 크로넨버그 감독은 톰의 정당한 폭력을 통해 ‘어떻게 폭력이 이어져왔고, 앞으로 계속 이어질지’에 대한 단서를 제시합니다.

폭력은 분명 인류에겐 큰 피해를 안겼습니다. 폭력은 인간 생존에 큰 위협입니다. 때문에 다윈의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폭력은 진작 사라져야했겠죠. 그럼에도 폭력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성장하고 이어져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역사적으로 대다수의 폭력은 정의와 선의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어쩔 수 없어서 폭력을 행사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잔혹함을 드러냅니다. 톰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듯, 인류의 폭력은 정당함의 이름으로 역사 속에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즉, 선의의 폭력이란 이름이 바로 폭력의 역사이며, 미래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 아래 자행되는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폭력은 우리 삶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크로넨버그 감독이 <폭력의 역사>를 통해 밝히는 폭력의 역사입니다. 폭력이 바람직한 역사를 창조하는데 필요한 수단이 되는 순간, 폭력은 인류의 독약이 아닌 보호수단이 됩니다. 때문에 폭력은 오랜 진화의 과정 속에서 견뎌내고 생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폭력의 역사
폭력을 끝내고 톰은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분명 톰은 폭력으로 가정을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톰이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심연 아래 숨겨져 있던 폭력의 공포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죠. 때문에 톰의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는 마지막 장면에는 폭력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가족의 불행이 어른거립니다. 참으로 섬뜩한 엔딩씬입니다.

크로넨버그 감독은 비폭력 저항을 했던 간디처럼, 모든 폭력이 사라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폭력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폭력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정당한 폭력이 존재하는 한, 폭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언제든 우리도 폭력의 가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인생의 종착역까지 가져가야 합니다. 말다툼 끝에 시어머니를 살해한 며느리 사건에 어떤 깊이 있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며느리가 설령 정당하게 폭력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폭력의 두려움 자체는 해소되지 못합니다. 바로 폭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두려움 말이죠.

반전, 평화 운동에 일생을 바친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학교에서의 체벌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학창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다’라고요. 마찬가지입니다. 폭력과 살인으로 정의를 지켰다고 믿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폭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폭력의 연대기가 이야기해주는 단 하나의 진리입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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