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올 4월 열리는 제21대 총선은 ‘첫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다. 정치개혁론자들의 오랜 투쟁과 정당들의 지난한 타협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이끌어낸 작은 변화다. 큰 물줄기를 바꿨다는 점에서 분명한 ‘변화’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마주하는 몇몇 풍경들은 그것이 얼마나 ‘작은’ 변화였는지에 대해서만 더욱 실감케 한다.

한 줄로 요약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이번 선거제도가 반쪽짜리에 그친다는 지적은 진작부터 나왔다. 우선 비례대표 총 의석수를 단 한 석도 늘리지 못했다. 전체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는 데도 실패했다. 무엇보다 비례대표의 존재 의미에 관해 논쟁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전무했다. 진작 던져졌어야 할 질문을 뒤늦게 던져본다. 왜 비례대표가 필요한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꼭 4년 전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있었던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기록을 돌아보면 참고가 된다. 당시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세 당의 의원 38명이 필리버스터에 나섰다. 이 중 비례대표 의원이 15명이었다. 제19대 국회에서 여당인 새누리당(25명)을 제외한 비례대표 의원이 29명이었으니, 야당 비례대표 의원 중 과반이 나선 셈이다. 전체 국회 의석으로 따지면 당시 국면에서 비례대표 의원들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진다. 전체 의석 수의 18%에 해당하는 비례대표 의원이 필리버스터 참여자의 약 40%를 차지한 것이다. 반면 3선 이상의 지역구 의원은 9명에 그쳤다.

테러방지법이라는 이슈는 분류하자면 ‘지역구 이슈’보다는 ‘전국 이슈’다. 지역구 선거에서는 테러방지법에 대한 입장을 공약으로 내걸어봐야 큰 소용이 없다. 하지만 전국 이슈를 다루는 비례대표 선거에서 테러방지법은 유권자에게 주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역할론으로 살펴봐도 전국 이슈는 지역민의 이해관계를 다루는 지역구 의원보다는 특별한 지역을 거점으로 두지 않은 비례대표 의원에게 어울린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벌어진 필리버스터에 비례대표들이 중심적으로 나섰던 것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비례대표가 필요한가? 지역구민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면서 전국 이슈를 폭넓게 다루기 위해서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의 당내 경선 패배는 이러한 비례대표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금 의원은 제20대 국회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진보주의자들에게 그러했는데, 그는 동료 의원들 전부에게 <82년생 김지영>을 선물하고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해 인증샷을 올리는 등 ‘리버럴한’ 가치를 적극 옹호하는 몇 안 되는 국회의원 중 하나였다. 그는 수사과정에서 피의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적극적으로 발의하기도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소년범 강력처벌’ 주장이 뜨거운 동의를 받는 와중에도 그는 소년범의 처벌이 아닌 재사회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핵심 지지자들에게는 조국 전 장관에 대한 비판과 공수처법 기권 등의 이유로 ‘배신자’로 불리기까지 했다지만, 어쨌거나 인권의 측면에서 보면 금 의원은 제20대 국회에서 가장 인권친화적인 의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런 그가 당내 경선에서 탈락했다. 패배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분석이 나왔다. 하나, 조국 전 장관 비판과 공수처법 기권으로 미운 털이 박혀 당원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는 것. 둘, 지역구 관리에 소홀했던 나머지 지역 여론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것. 특히 두 번째 분석에 따르면 그가 지역 내 권리당원 및 유권자들을 충분히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가 비례대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당 주류가 받지 못하는 페미니즘‧퀴어 주제에 적극적이었고 ‘국민감정’을 거스름에도 불구하고 피의자 인권을 보장하고 소년범의 강력처벌에 반대한 그의 활동은 말하자면 비례대표 의원의 역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역구 선거란 지난 4년간의 의정활동의 성과를 평가받는 자리라기보다 그와 상관없이 또 다른 ‘정치’를 벌여야 하는 무대였을 것이다. 보편적 가치보다는 지역의 이익이, 4년간 증명해온 실력보다는 최근 몇 개월간 쌓아온 스킨십이 더욱 힘을 발휘하는 그 무대에서 금태섭 의원은 패배했다. 물론 그것이 지역구 선거제도의 ‘합의된 룰’임을 금태섭 의원 또한 받아들였을 것이므로 그의 패배는 온전히 그의 책임이겠지만.

그가 처음부터 비례대표로 출마했다면 어땠을까. 성공적으로 초선 활동을 마무리하고, 다시 비례대표 후보로 재선에 나서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정치문화였다면 어땠을까. 비례대표가 ‘국회의원이 되는 쉬운 길’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역구 부담을 제거하는 길’로 정확히 이해되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다음 4년 동안에도 인권에 천착하는 국회의원을 한 사람 정도는 더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정치문화는 비례대표에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고, 그래서 많은 초선 비례대표 의원들이 재선에 임하면서는 지역구 선거의 문법으로 회귀해 왔다.

앞으로의 선거제도 논쟁은 비례대표의 이와 같은 논점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왜 비례대표가 필요한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미래에 필요한 것은 지역구 선거제도가 도출하는 가치인가, 아니면 비례대표 선거제도가 도출하는 가치인가? 지난날의 정치개혁은 그러한 질문 없이 타협될 수 있는 제도 설계에만 매몰되어 만들어진 결과였다. 우리가 그 결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은 비례대표가 정치게임의 수단으로 전락한 나머지 미래한국당이니 비례연합정당이니 하는 아사리판이 난무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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