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코로나19에 감염된 게 아닌지 의심이 든 적 있다. 바이러스가 확산되던 초기, 내가 사는 지역의 확진자 동선이 공개됐었다. 내가 같은 날짜에 다녀간 동네가 있었다. 직후 자각 증상이 왔다. 확진자들의 동선과 내가 그날 거닌 동선을 머릿속에서 병렬해 보며 교차점이 존재할지 떠올렸다. 불안감이 무거워지니 몸 상태도 무거워졌다. 보건소에 전화해 상담을 하니, 그 정도로는 가능성이 낮다, 일단 몸 상태를 지켜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주위 사람들과 되도록 밀접한 접촉을 피하고 식사를 따로 하며 지냈다. 3주 넘게 지났다. 증상은 사라졌고 주위 사람들도 증상이 없다. 자연스레 결론이 내려졌다. 아닌 것이다.

해프닝이었다. 동선이 겹치는 정도로 감염이 될 가능성은 낮다. 알고 있다. 뉴스를 찾아본 정보로 알고 있었고, 보건소에서 알려준 이야기로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나는 이 바이러스에 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다. 나를 넘어 이 사회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새롭게 나타난 변종 바이러스이기에 지식은 제한적이다. 코로나19에 관해 검색을 할수록 모순되는 정보를 접하게 됐다. 날씨가 풀리면 전염력이 줄어들 것이란 의견이 있고, 날씨가 풀려도 달라질 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마스크는 불필요하다는 의견이 있고, 공적 마스크를 5부제로 불출하는 정책이 있다. 물체 감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의견이 있고, 신종 코로나는 물체 겉면에서 일주일 넘게 생존하는 질긴 바이러스라는 정보가 있다. 모두 전문가들 입장이다.

11일 오후 서울 신도림역에서 관계자들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방역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어떤 대상이든지 성질이 하나로 정리되긴 힘들고 학설은 나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건 미지의 터널을 미처 통과하지 않은 대상이다. 이만큼 전염력이 강한 신종 바이러스가 세계를 떨게 하는 사태가 나로선 처음 접하는 사건이다. 전전긍긍하는 사이 무시무시한 확산 추세와 기구하게 감염된 이들의 뉴스가 시시각각 스마트폰에서 터진다. 알 수 없다. 정확히 어떤 조건에 있어야 안심할 수 있는지, 언제쯤 종식될 것인지, 집계되지 않은 감염자는 몇 명일지, 내 생활 반경에 드나드는 누군가가 감염된 것은 아닌지, 지금 나는 얼마나 안전한지. 그저 더듬을 수밖에 없기에 무섭다.

전염과 접촉, 미지와 차단. 이것들이 내 눈에 비친 신종 코로나 현상의 키워드다. 매일 같이 바이러스가 퍼져가는 기세를 보면 전율을 일으키는 면이 있다. 국내에선 긴장이 옅어질 때쯤이면 거듭 돌발 변수가 일어났고, 지구 반대편에 떨어진 유럽에서도 걷잡을 수 없이 감염자가 증가한다. 대구에선 보건소 팀장이 바이러스에 감염됐으며 영국에선 보건부 차관에게 확진이 떨어졌다. 차관은 총리를 비롯한 영국 정치인들과 접촉한 상태이며 한국의 외교부 장관과도 면담을 했다고 한다. 무슨 나비 효과를 보는 것처럼 바이러스는 연쇄적으로 작용을 일으킨다. 감염자 숫자는 수십억 세계 인구 중 10만여 명이지만, 숫자를 넘어 세계의 요충지에 파장이 스미고 있다. 혹시나 감염된 것은 아닐지 가능성이 떠오른 2주 동안 착잡했던 점도 나 자신의 건강을 넘어 가까운 이들에게 불행을 전염시킬 수도 있다는 자책감이었다. 이 미지의 베일을 걸친 바이러스는 사람과 사람의 접촉, 사회적 관계에 기생하며 강대해진다.

좀비 영화에서 사람이 좀비가 되고 좀비가 증식하는 클리셰는 감염이다. 바이러스에 의해 좀비가 된 이들이 타인을 물어뜯거나 생채기를 내며 ‘접촉’을 해서 제 몸에 든 좀비화 인자를 전염시킨다. <월드워 Z>는 좀비가 전염병처럼 세계를 황폐화하는 이야기인데, 세계 각국이 잠식당하거나 잠식을 막기 위해 국가 외부를 차단하는 장벽을 치는 설정에서 신종 코로나를 방어하려 출입국 규제를 거는 현재 각국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접촉이 사람을 좀비로 만든다면, 가장 긴밀하게 접촉하는 관계가 변수가 된다. 좀비 영화의 또 다른 클리셰는 가족과 친구, 애인이 좀비로 변하는 딜레마로 좀비에게서 달아나는 단순한 플롯에 진폭과 멜로드라마를 주는 것이다. 한국의 좀비 영화 <부산행>에서도 이런 딜레마가 연출이 된다. 딸이 좀비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달리고 남편과 친구가 좀비가 되어 돌아온다.

영화 <부산행> 칸 영화제 해외 스틸 이미지

얼마 전 한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 베스트 게시판에는 <부산행>의 악역, 배우 김의성이 분한 인물 용석을 재평가하자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다른 승객을 배척하고 희생시키길 마다하지 않은 인물이다. “초기 방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 (...) 방심하지 않는 생존전략을 꾸려가던 사람”이라는 멘트는 “감성에 선동된 민폐 쟁이들 때문에 결국 희생된 사람”이란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유머의 말투를 빌려 변명할 수 있는 도피처를 마련해놓은 게시물이지만, 이런 시국에 이런 유머를 던진다는 것부터가 유머일 수는 없다. 대부분의 시민이 재난의 위기감과 보이지 않는 외부의 위협을 이만큼 보편적으로 겪은 적은 없을 것이다. 개인의 생존의 당위가 강렬해질수록 생존의 기회와 자원을 타인과 나누는 윤리는 부차화된다. 그런 건 ‘감성’과 ‘선동’으로 보일 것이다. 사회의 질서를 병마의 위력이 잠식하는 과정 속에, 사회에 깔린 정글의 논리가 더 원초적인 형상으로 비집고 나온다.

자력 구제의 가장 확실한 해답은 사회적 접촉의 차단이다. 감염될 가능성 자체를 줄이는 방법이다. 거리는 비어 있고 사람들은 만나지 않는다. 낯선 타인에 대한 기피 심리는 신천지 교도가 신종 코로나를 퍼트릴 목적으로 주거지를 방문한다는 ‘가짜뉴스’를 낳았다. 확진자들이 대중교통을 타고 시가지를 돌아다녔다는 뉴스는 민폐를 끼치는 타인을 향한 탄식과 미움을 달군다. 감염자가 많은 지역에 대한 색안경 같은 발언, 숨어있는 신천지 교도들을 색출해야 한다는 뉘앙스의 여론도 있었다. 가정과 회사에서 일어나는 집단 감염 뉴스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일깨운다. 주변 사람이 토하는 기침과 같은 사소한 징후에 촉각이 서고 근심과 불안감이 깃든다.

개인의 영역 바깥에 대한 자발적 고립이 ‘서바이벌 매뉴얼’이자 재난에 대응하는 윤리로 권장된 지 한 달이 되어 간다. 돌림병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에 대한 암암리의 불신은 고착될 것이고, 접촉에 대한 두려움도 짙어질 것이다. 언제 떠나갈지 알 수 없는 이 시간 동안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관계를 받치는 토대의 침식으로 전이되진 않을까. 역시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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