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앞에서 짝짜꿍’

우리가 어릴 적 엄마에게서, 학교에서 배웠던 동요의 작곡가가 누군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릴 때야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흥얼거리는 것이 다였으니까.

윤극영의 반달, 박태준의 오빠생각, 홍난파의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의 동요는 학교에 가서 음악시간을 통해 배웠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동요로 자리매김됐다.

하지만 학교에 가기 전에 흔히 엄마의 구전으로 따라 부르며 배웠던 동요가 있었으니 ‘짝짜꿍’이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엄마 한숨은 잠자고/ 아빠 주름살 펴진다’

▲ 2010년 11월12일, 정순철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제3회 짝짜꿍동요제에서 죽향초 병설유치원 아이들이 은'아기다람쥐 또미'를 부르고 있다. ⓒ옥천신문
짝짜꿍 노래를 요즘 아이들은 제대로 듣고 자라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여전히 그 기본은 남아 있다. 이 땅의 많은 할머니들은 아기들을 어를 때 ‘짝짜꿍, 짝짜꿍’ 하고 있지 않은가.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하는 졸업식 노래.

지금이야 졸업식이 되도 아쉬워 눈물 흘리는 풍경을 잘 볼 수는 없고, 간혹 눈시울이 벌게져서 눈물 흘리는 아이들이 오히려 구경꺼리가 되어 있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현장이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라는 노래. 매년 어린이날만 되면 어린이노래와 함께 이 동요는 어린이날 행사장만 가면 들을 수 있다. 어떤 자료를 보면 작곡가가 잘못 표기돼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라를 다시 찾은 감동을 한데 모아 새로운 나라, 새로운 나라의 어린이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커나가야 할지를 당시의 소박한 심정으로 그린 노래이다.

이들 동요와 노래를 작곡한 이가 1901년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 출신 정순철 선생이다. 천도교 제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의 외손자이다.

▲ 정순철 평전
그의 탄생과 최후는 우리 역사의 질곡이 그대로 반영된 비극적인 것이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최시형 선생이 몸을 피하고 있을 당시 청산관아에 잡혀 있던 해월 선생의 딸 최윤과 청산군 관아에서 일하고 있던 정주현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청산군수가 최시형 선생의 딸을 데리고 살라며 정주현에게 주어버림으로써 정순철 선생이 태어나게 됐다.

우리 동요사는 위에서 언급한 윤극영, 박태준, 홍난파 등과 함께 정순철 선생을 4대 동요 작곡가로 꼽고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다는 이유로 그동안 이 작곡가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작곡가가 누군지 제대로 밝히려는 노력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짝짜꿍’이 ‘우리 애기행진곡’이란 제목으로 동요집에 실려 발표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9년이었다. 일제강점기 전 국민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천도교 제3세 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사위인 소파 방정환 선생과 함께 시작한 어린이운동의 하나였다.

‘짝짜꿍’은 마땅히 우리 민족이 부를 노래가 없었던 당시 개국한 경성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대표적인 유아 동요가 되었다. 아니 유아 동요이긴 하지만 암흑기 속에서도 어른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동요였다. 아기의 재롱이 엄마의 한숨을 잠재우고, 아빠의 주름살을 펴지게 하는 구실을 하는 동요로 자리매김한 것이었다.

이 동요는 어린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최시형 선생의 정신에 따라 삼일운동 후 천도교소년단이 만들어지고, 세계적으로도 처음을 다툴 정도로 빨랐던 우리나라 어린이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정순철 선생은 어릴 적 서울로 올라가 손병희 선생의 보호를 받았고, 방정환 선생을 만나게 됐으며, 천도교소년단 활동을 하면서 1923년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행사를 하며, 동요를 작곡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요 전파에 힘썼다. 평생을 함께 붙어다닌 방정환과 정순철은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특히 윤극영 선생 등을 방정환과 연결, 이후 동요 황금기를 구가하게 되는 기초를 닦았고,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윤석중 선생 등과 함께 노래동무회를 만들어 많은 동요를 작곡해 발표했다.

정순철 선생의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6년이다. 도종환 시인이 오장환 시인을 연구하다 정순철이라는 이름을 발견했고, 옥천 출신 짝짜꿍 작곡가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옥천에서는 작은 세미나와 연구들이 지속되면서 2008년 정순철 기념사업회를 구성, 매년 정순철 짝짜꿍 동요제를 개최하고 있다.

▲ 13일 오후 5시30분 명가에서 열린 정순철 선생의 평전 출판기념회에서 평전의 집필자인 도종환 시인이 팬사인회를 하고 있는 모습. ⓒ옥천신문
올해 정순철 선생의 동요사랑, 어린이 사랑정신을 잇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1년간에 걸친 도종환 시인의 연구와 노력으로 ‘정순철 평전’이 출간된 것이다. 지난 5월13일 조촐한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그동안 묻혔던 정순철 선생의 일생이 자료를 찾는 노력과 함께 책을 통해 다시 비춰질 수 있어 다행이다. 우리 현대사 비극으로 인해 가려졌던 이들의 일생을 하나하나 복원하는 소중한 노력이다.

정순철 선생 이외에도 옥천 땅에서 낳아서 근현대사에서 활동했던 중요 인물들이 많이 그랬다.

전국민의 애창곡이 된 ‘넓은 벌 동쪽 끝으로~’로 시작하는 ‘향수’를 지은 이. 납북시인이라는 이유로 1988년 해금된 후 뒤늦게 조명이 시작된 옥천읍 하계리 출신 정지용 시인이 그렇고, 옥천군 청산면 지전리 출신으로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기초를 닦은 신한청년당 결성과 아울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이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며, 1932년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해 동아일보에 앞서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 당시 일장기를 말소해 보도했던 항일 독립투사이자 언론인 유정 조동호 선생도 사회주의자라는 멍에 때문에 2005년에서야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

1974년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 당시 편집국장 직을 내던지고 우리나라 언론민주화운동의 산증인으로 한평생을 살았던 청암 송건호 선생 역시 그랬다.

이들은 모두 옥천 출신이지만 이념 문제로,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빛을 볼 수 없었던 인사들이다.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인물들이지만 이들이야말로 지금 이 나라가 건강하게 설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 이들이다. 이들의 맑고 곧은 정신을 잇고, 나라를 제대로 서게 하는 것이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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