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실화다. 평일 오전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기생충> 재관람을 하던 날이다. 마실을 나오셨을까. 칠순은 족히 넘어 보이는 열댓 명의 어르신들이 두 줄로 나눠 앉아 영화를 보셨다. 그리고 장장 131분이 흐른 후, 어르신 한 분이 감상평을 외치셨다. ’이거 완전 사기꾼 영화야’. 사기꾼 가족이 나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줄 알았다. 하지만 3초도 지나지 않아 섣부른 판단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 어르신은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기꾼이 어딨냐'며 ‘영화 같지도 않은 영화’라고 격한 분노를 터트리셨고 다른 분들도 그에 맞장구를 치며 나란히 화장실로 들어가셨다. <기생충>에 불호는 나타낸 건 가난을 가볍게 소비했다는 이유로만 접했던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아마 봉 감독도 현장에 있었다면 그분들의 화를 풀어드리기 위해 그립감이 좋아 보이는 본인의 머리채(a.k.a crazy hair)를 얌전히 내어드렸을 거다.

영화 '기생충'

<기생충>의 동질성과 이질성

이야기를 잠깐 돌려보자. 국제(+미국 로컬)영화제 최우수상 수상은 박찬욱 감독이 빠를 거라 예상했다. 두 거장의 우위를 가르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의도적으로 지역적, 시대적 배경을 탈색한 무국적성으로 국제성을 획득한 박 감독의 작품세계와 달리 <살인의 추억>, <마더> 같은 봉 감독의 영화는 한국이라는 지역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100% 즐기기 어려웠으니까. 그런 와중에 '반지하'를 번역할 단어가 없어 애먹었다며 외국인이 이해할까 걱정하던 작품이 당당하게 국제인증을 받았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이라는 스콜세지의 격언을 따르듯 <기생충>은 지극히 봉 감독다운 작품이다. 2000년에 나온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부터 정확히 20년간 변주해 온 테마인 ‘약자 간의 사투에서 나오는 페이소스’ 말이다. 악의적으로 말하자면 ‘또준호’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익숙한 테마다. 그럼 왜 하필, 이 시점에서 <기생충>은 로컬을 넘어 글로벌 아이콘이 됐을까.

일단 봉 감독의 연출력이라는 근거는 제외하고 싶다. 모든 감독의 최신작이 최고작이 아니듯, 황금종려상과 오스카 수상 후에도 <기생충>이 봉 감독의 최고작인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봉 감독 영화에서 완성도가 문제된 적은 없었다. 양극화라는 전 세계적 문제에 접근했다는 설명에도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이미 <설국열차>에서 헐리웃 배우들을 섭외해 다룬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단순히 공감의 범위만 따지자면 모성애에 과감한 물음표를 던진 <마더>는 양극화보다 더 진하게 전 인류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탓이다.

앞선 이유와 달리 일단 기술적 측면에 접근하고 싶다. 넷플릭스 같은 OTT(Over the top)와 유튜브의 등장으로 자막이 꼭 필요한 로컬 콘텐츠들도 글로벌한 유통이 가능해졌다. 기술은 ‘1인치의 벽‘이라는 자막 문제를 서서히 해체하던 중이다. 산업적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한국영화의 산업저변이 확대되며 충무로-헐리우드-칸의 거리가 좁혀진 변화가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와이드릴리즈는 아니지만 한국영화가 글로벌 마켓에서 판매됐다는 뉴스는 이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반면 국경을 뛰어넘은 산업적 거리의 축소가 부각되는 만큼 도드라지는 건 지역공동체에 상존하는 이질성이다. LA와 칸의 아트하우스에서 <기생충>이 스크린에 걸리는 장면은 상상할 수 있으나 경쟁작 후보인 <아이리시맨>, <결혼이야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를 해남 땅끝마을이나 속초 아바이마을의 극장에서 만나기는 불가능하다. 영화라는 주제에 한하면 서울-해남-속초보다 서울-LA-칸의 문화적 동질성이 높다.

<기생충>에 대한 감상에도 동질성에 가려진 이질성이 있다. <기생충>에 대한 감상평은 돈이 되는 아이템이다. 리액션이 하나의 장르가 된 유튜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레거시미디어에서도 ‘두 유 노 봉준호?’로 대변되는 각국의 감상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반면 모국의 노년층이 <기생충>을 어떻게 소비했는지 주목하는 시선은 찾기 힘들다.

접근성 좋은 서울 사대문 안의 극장에서 만난 노인이 강렬한 분노를 내비친 것과 배 타고 2시간 들어가야 하는 낙도의 어르신의 감상은 또 다를 수 있다. 이처럼 ‘국민연금도 해당사항 없고 노후는 정으로‘ 살지도 모를 문화사각지대의 노년층은 <기생충>에 대해 또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이 또한 누구도 답을 내릴 수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영화 '기생충'

포스트 기생충의 검은 상자를 열어보시겠어요?

<기생충>에서 지옥문 개방의 서곡은 다송과 근세의 만남이다. 개인으로서의 근세가 아니라 사회안전망에서 완벽하게 탈락한 사각지대의 빈곤층을 대변하는 근세 말이다. 지상의 다송이 지하의 근세를 사람이 아닌 귀신으로 오해해 기절하지만 않았어도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진행됐을 것이다. <기생충>이 차마 열지 못한 검은 상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봉 감독이 세운 계획의 일부였는지 모르겠으나 근세(박명훈)의 원래 캐스팅은 변희봉 배우로 문광의 아버지 ‘국경호’ 역할을 제안 받았다고 한다. 건강 문제로 출연이 불발된 이 에피소드는 단순히 봉준호사단의 이탈이 아니라 노년층의 삭제라는 사건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기생충>의 탁월한 부분은 반지하 아래 지하의 발견이라면 포스트 기생충의 검은 상자는 바로 미지의 인물로 남은 국경호가 쥐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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