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슬립다운인가 녹다운인가였습니다. 복싱에서 슬립다운은 미끄러져 넘어진 다운을 말합니다. 일종의 실수죠. 녹다운은 상대의 펀치를 정통으로 맞고 쓰러진 다운입니다. 확실한 다운이죠. 영화 <파이터>의 전직 복서 출신인 딕키는 약에 중독된 폐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전설적인 복서 슈가레이 레너드를 녹다운 시켰다는 자부심 하나를 믿고 살아갑니다. 슈가레이 레너드를 녹다운 시켰단 사실은 현실의 비루함을 모두 잊게 해줄 마약 같은 추억입니다. 때문에 딕키에게 슬립다운인가 녹다운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복싱계의 전설 슈가레이 레너드를 녹다운 시켰다면, 승패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슬립다운이었다면, 딕키는 과거의 기억을 자부심으로 간직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 영화 <파이터>
영화 <파이터>에는 딕키가 슈가레이 레너드를 다운시키는 장면이 살짝 등장합니다. 슬립다운입니다. 하지만 딕키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억력이 만들어낸 완벽한 착각입니다. 인간의 기억력은 불완전하며, 곧잘 자신이 믿고 싶은 내용에 따라 기억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디키는 진짜로 자신이 녹다운 시켰을 거라 기억할지 모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인지부조화입니다. 디키는 한 때 자신이 슈가레이 레너드를 녹다운 시켰던 복서란 사실 하나만으로 삶을 지탱하며 살아가죠. 그에게 과거의 녹다운은 일종의 신념이자 믿음입니다. 그러나 녹다운이 아닌, 슬립다운이라면 자신이 믿고 있는 내부의 신념에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신념(내가 최고의 복서야)과 현실(슈가레이 레너드는 슬립다운 된 거야)의 불일치는 디키에게 압력을 가하고, 디키는 모순 극복을 위해 자신이 상대를 녹다운 시킨 것이라 믿게 됩니다. 일종의 자기 정당화죠.

전 인지부조화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딕키는 미끄러져 넘어진 슈가레이 레너드를 봤을 겁니다. 하지만 슬립다운은 자신을 최고의 복서라고 생각하는 디키의 믿음을 완성시켜주지 못합니다. 때문에 딕키는 자아를 지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현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관성의 강박 때문이죠. 일관성의 강박은 모순을 견디지 못하는 완벽주의에서 비롯됩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난 훌륭한 디자이너야)을 고수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비틉니다.(공모전 실패는 선배의 실수 때문이야) 지난 번 ‘나는 가수다’에서 꼴등을 한 김건모는 계속 ‘립스틱을 바른 것 때문에’라는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제가 볼 때 그는 다른 가수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믿음(난 최고의 가수다)을 유지하기 위해 진실(최선을 다하지 않은, 또는 노래를 못 부른)대신 가상의 진실(립스틱 퍼포먼스 때문이야)을 만들어내야만 했습니다.

▲ 영화 <파이터>
일관성의 강박은 우리의 삶을 팍팍하게 만듭니다. 사소한 모순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스스로를 자학하고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 삶은 과학 이론이 아닙니다. 모순적인 현상 한 두 가지로 인해 결코 붕괴되지 않는다는 거죠. (과학 이론이라면 사소한 모순점이라도 치명적이지만요.) 슈가레이 레너드가 슬립다운으로 넘어졌다고 하더라도, 딕키가 한 때 최고의 복서였다는 사실은, 또 그가 뛰어난 복싱 전략가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슈가레이 레너드와 대등하게 싸운 것만으로도 대단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김건모가 ‘나는 가수다’에서 7등을 한 번 했다고 해서, 가수로서의 뛰어남이 부정되는 것 역시 아니죠.

사실 우리에게 인지부조화의 압력을 가하는 삶의 다양한 모순들은 우리 삶의 본질을 뒤흔들 만큼 강력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린 사소한 모순에 신경을 쓰며 살아갑니다. 일관성의 강박에 집착을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세간의 입들이 사소한 요소에 큰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로웰의 주민들도, 미키의 애인 샬린도 슬립다운인가 녹다운인가의 문제가 마치 복서 딕키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이야기하니까요. 그래서 우린 삶의 사소한 모순들까지도 신경을 씁니다. 쉽게 말해 내 삶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실패나 굴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실패를 당당히 직시하는 대신, 자기 정당화와 현실 왜곡을 시도하게 됩니다.

▲ 영화 <파이터>
샬린에게 ‘슈가레이는 녹다운된 게 아니고 미끄러진 거야’란 말을 듣고 난 뒤, 딕키는 돌아서서 자신의 동생이자 또 다른 복서 미키에게 묻습니다. ‘너는 내가 슈가레이를 녹다운 시킨 걸 믿냐’ 동생 미키는 답합니다. ‘당당하게 10라운드까지 끌고 갔잖아. 형은 언제나 나의 영웅이었어’ 미키는 슬립다운인지 녹다운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거든요. 중요한 건 딕키가 미키에게 영웅이었다는 사실, 그 만큼 딕키는 훌륭한 복서였다는 사실이고, 그게 본질입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비본질적인 논란, 실패 여부, 자존심의 상처 등은 전부 내가 구축한 세계를 위협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슬립다운 여부를 부정하고 회피하려는 것보다는 ‘내가 최고였다’는 자뻑이 필요한 것이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들은 늘 자뻑과 자학의 가운데서 줄타기를 한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뛰어난 작곡가인가와 난 진짜 무능한 작곡가 사이를 왕복한다.) 중요한 말입니다. 자신의 세계에 대한 믿음, 사소한 실패와 모순으로 그 세계가 무너지지 않으리란 자신감이 없다면, 우린 그 어떤 일도 창조해내기 어렵습니다.

경쟁이 보편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는 복싱 경기를 100경기 이상 소화한 노장 복서들입니다. 100전 이상 경기한 복서에게 20-30경기의 패배는 무의미합니다. (그래도 승률이 70-80%다!) 아니, 50번도 질 수 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계속 링 위에 올라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르죠. 세상은 우리에게 100번 이상의 경기를 요구해놓고, 어떻게 20-30번이나 질 수 있냐고 힐난합니다. 그래서 100경기를 소화한 노장 복서들이 요즘 다들 주눅 들어있습니다. 지난 몇 번의 패배에 사로잡혀 지냅니다. 때론 그 때의 패배가 사실 복싱 슈즈가 안 맞아서라고 변명합니다. 또 누군가는 패배가 싫어 링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좀 만날 지면 어떠한가요. 그래도 꾸역꾸역 링 위로 올라간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 아닌가요. 몇 번의 패배가 링 위에 올라가는 나의 본질을 바꾸진 못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자뻑의 주문 말입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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