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울산에서 오래된 얼굴이 찾아왔다. 너무 오래다. 포옹을 하면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씨로 하였다. 정기간행물사업자 이종호 씨.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 대상자 연수차 김대중컨벤션센터에 왔다가 방송국에 들렀다. 그와는 20년 전 ‘비제도적투쟁정당’ 할 때 만났다. 마지막에 언제 봤더라. 시간과 장소가 생각나면 얼굴이 안 떠오르고 얼굴이 생각나면 장소나 시간이 흐릿하다. 15년 전이구나. 나는 민중언론을, 이종호 씨는 노동자신문을 시작하던 때다. 신문법에 인터넷신문이 포함되면서 제도권 미디어 활동이 가능해졌다. 비제도적 말과 글이 몸에 밴 시절, 제도적 언론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느라 불편했던 느낌이 남아 있다. 그해 ‘인터넷언론네트워크’라는 연대 활동이 있었고, 인터넷언론 무슨 토론회에서 만났고, 밤새 술을 마셨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오랜만인데 별 일이 없어 보인다. 나도 그리 보이나 보다. 과거의 상은 휙 스치는 것. 황우석, 비정규직법, 한미FTA, 평택 미군기지 이미지가 휙 스쳐간다. 그 해 공동체라디오방송 시범사업자 신청을 했다가 미끄러졌다고 했다. 그랬지, 그랬다. 가까운 대구성서가 선정되고 울산은 떨어졌었다. 그동안 대구성서가 고생하는 걸 보니 떨어진 게 다행이라는 웃픈 말을 보탰다. 신문 필진이 300명이나 된다 하여 광주시민방송 방송활동가가 161명이라고 응대했다. 신문 만드는 공동체는 여전하지만 어떤 공동체인지 설명은 힘들다고 했다. 공동체라디오를 하는 나도 그렇다.

신규 공동체라디오방송 설립 추진 워크샵이 지난 1월 22일 예비 공동체라디오방송사업자와 한국공동체라디오방송협회 소속 방송사 등 전국 21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15년 전에 평택 대추리 사건이 있었다. 두 국가가 군사기지를 만들면서 유구한 촌락공동체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사건이다. 이 현장에 ‘솔부엉이라디오’와 ‘들소리방송국’이 있었다. 이장님이 사용하던 스피커 라디오다. 지난달 신규 공동체라디오방송 확대 워크샵, 20여 개 단체가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들소리방송국’을 했던 장수정 씨를 만났다. 그는 7년 전부터 서대문구에서 ‘가재울라듸오’를 하고 있다. 동작구 ‘동작FM’ 양승렬 씨도 이 현장 출신이다.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소식을 뜨문뜨문 본다. 장수정 씨와 양승렬 씨가 하는 마을라디오는 공동체 지향이 뚜렷하다. 대추리 주민 공동체가 붕괴되는 현장에서 아픔을 같이하며 처음 방송 활동을 시작했던 연유가 크리라 짐작해본다. 양승렬 씨를 광주로 초청해 공동체라디오 강의를 들었던 게 6년 전이니 15년이나 6년이나 시간이 빠르다.

광주시민방송 정규방송 ‘차밍팝스’는 지난주 145회 생방송을 했다. 한 주도 거르는 일이 없으니 휴일 빼고 꼬박 3년이다. 임원택 디제이는 교육공무원으로 직장이 목포였을 때는 매주 월요일 퇴근 후 방송국으로 와서 생방송을 했다. 작년에 해남으로 승진 발령이 났다. 해남에서 광주까지 와서 두어 번 해보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남우리신문이 운영했던 해남FM에 협조를 구해 생방송을 이어가고 있다. 광주시 남구 월산4동 마을방송 ‘수박등의 하루’ 최지숙 디제이는 매주 금요일 오전에 방송국을 찾는다. 110회 방송, 그의 오픈채팅톡에는 월산4동 주민 50여 명이 상주하며 매일 사연과 음악을 나눈다.

3년 전 부산에서 ‘051FM’을 운영하는 정욱교 씨가 다녀갔다. 부산의 청년 공동체들, 더쿠, 인디, 동호회를 하는 청년들이 ‘051FM’ 타임라인에 보이는 라디오로 흐른다. 직접 라디오를 하는 즐거운 표정은 각별하지만 광주와 부산이 다르지 않다. 제주 귀촌 10년 된다는 안광희 씨는 ‘문화공동체 서귀포사람들’을 운영한다. 4년 전부터 공동체라디오 ‘제주살래’ 방송을 해오고 있다. 신규 확대 워크샵에서 처음 만났다. 공동체라디오방송국을 하고픈 열망이 강하다. 그가 하는 문화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지 그가 하고 싶은 공동체라디오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지 궁금하다.

방송법에는 공동체 정의가 없다. 공동체라디오 정의도 없다, 사업자 정의만 있다. 지상파방송이 아닌 공동체라디오방송사업자를 별도로 한 이유가 불분명하다. 사업자 정의에서 단서는 ‘안테나공급전력 10와트 이하’, ‘공익목적’ 단 두 개. 15년 전 공동체라디오방송을 도입할 때 왜 10와트로 묶어두었는지 모르겠다. 잘 설명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공익에 대해 한국방송공사는 공정성과 공익성을 실현하고 시청자의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는 정도로 해놓았다. 공동체라디오방송은 공익 자체가 목적이다. 한국방송공사보다 쎄다.

방송법에는 공익목적의 정의도 없다. 소유제한 조항에서 유추 해석해보는 정도다. 공동체라디오방송사업자가 될 수 없는 자로 대한민국 정부, 지방자치단체, 종교단체, 정당, 영리를 목적으로 사업을 영위하려는 자를 열거해 놓았다. 존재감이 없다. 규제당국이 2011년 방송시장을 획정할 때 공동체라디오방송은 안중에 없었다. 2020년 방송통신 서비스체계 분류에도 공동체라디오방송은 안 보인다. 이같은 바탕에서 15년간 존재해온 7개 방송국 사업자들이 그저 존경스럽다. 지금이라도 공동체나 공익목적 정의를 방송법에 도입하는 건 어떨까. 별로다. 무위의 공동체도, 밝힐 수 없는 공동체도, 공통체도, 감각의 공동체도 손에 딱 잡히지 않는다. 방송에 관한, 당대 공동체나 공익목적을 정의 내릴 수 있는 기인도 없어 보인다.

이종호 씨와 같이 꿈꾸었던, 각인의 발전이 만인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생산자사회는 물 건너가고, 낱낱이 개인화된 각인의 상품 구매능력이 만인의 부러움을 사는 소비자사회에 살면서 대관절 공동체란, 공동체라디오방송이란.

밤 11시쯤 옆 가게에서 술을 마시던 청년 커플이 라디오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종종 있는 일이다. 요즘 전남대를 한전남대라고 한단다. 한전에서 전남대 학생을 많이 데려가서 최고라고. 청년은 개그 쪽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불콰한 얼굴들, 청년 커플과 이종호 씨를 2층 스튜디오로 안내했다. 좋아하는 한 곡씩 주세요. 청년 커플은 박군의 ‘한 잔 해’와 엠시더맥스의 ‘그때 우리’를, 이종호 씨는 ‘죽창가’를 골랐다. 헉 재미있다. 청년 커플은 조만간 큐시트를 준비해서 방송국을 다시 오겠다고 했다. 광주시민방송 정규편성은 보통 이런 수순을 밟는다. 정규편성에 참여하는 방송활동가는 제각기 방식으로 공동체를 읽고 쓴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아니고 와서 모여 함께 각자가 된다.

꽤 늦은 밤, 그는 울산에서 공동체라디오방송 할 만한 사람 두어 명이 떠오른다는 말을 남기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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