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의 전성시대’를 두려워 않는 바보들에게 유쾌하게 화내는 방법

인간의 행동 혹은 사회적 실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개념(槪念)’과 ‘법칙(法則)’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렵지만, 개념은 행동과 실천의 토대가 되는 이성적 인식이고, 법칙은 행동과 실천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필연적 추세이다.

정부 조직 개편을 둘러싼 벼랑 끝 대치가 계속되고 있지만, 이명박 정부 조직의 초대 장관들은 이미 발표되었다. 일이 진행되는 꼴과 장관들의 면면을 보면 ‘말들의 시대’를 열었던 노무현의 행동과 참여정부의 실천을 훌쩍 넘는다. “(아~ 변사톤으로)이로써 우리의 화려했던 ‘말들의 시대’는 지고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비로써 우리는 ‘말들의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 이었다.”

각설하고, <고(려대)ㆍ소(망교회)ㆍ영(남)>의 귀환으로 압축되는 최근의 상황을 보며 어쩔 수 없이 ‘개념(槪念)’과 ‘법칙(法則)’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세계일보 2월15일자 3면.
개념 : 이명박 정부의 패러다임

이명박 정부에는 태초에 ‘패러다임(paradigm)’이란 숭고한 개념이 있었다. 개념어 사전(남경태, 들녘)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미국의 과학사가인 토마스 쿤이 제시한 개념이다. 과학 발전의 역사는 옛 것에서 새 것을 차근히 배우는 과정이 아니라 옛 것을 새 것으로 완전히 대체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즉, 연속이 아니라 단절이고, 연장이 아니라 비약이며, 진화가 아니라 혁명이었던 과학 발전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학에서 빌려온 개념이라고 한다. 이후 패러다임은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원용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과장이 되기 위한 김대리와 이대리의 치열한 쟁투를 묘사하는 일상적 언어로 쓰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먹물적 용어이고 정확한 뜻조차 아리송하기까지 한 패러다임이 오늘의 사회를 지배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으로 재인식된 것은 작년 대선이었다. 작년 대선을 지배했던 언어는 두 단어였는데, 그 중 첫째가 바로 패러다임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한나라당의 대선원정대(박형준 등)는 끊임없이 노무현 패러다임의 문제를 제기했고 그 패러다임의 패악을 해소하기 위한 정권 교체를 호소했다. 일관됐다.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집권이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사회적 패러다임의 교체를 요구하는 세력의 집권으로 ‘격상’시키며, 과거 패러다임을 지키려는 세력을 무능?무기력?무용의 집단으로 ‘격하’ 시켰다.

패러다임이 '사례·예제·실례'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語)에서 유래한 것을 상기한다면, 지난 대선에서 교체의 대상이 된 노무현 정권은 실패의 사례, 오답의 예제, 반성의 실례였다.

법칙 : 대운하, 경제, 실용의 프레임

패러다임의 교체가 개념적 층위에 있는, 따라서 다소 모호한 추상이었다면 이를 실천적 층위에서 설득력 있게 했던 법칙이 바로 ‘프레임(frame)’이었다.

여기서 잠깐, 프레임의 유행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프레임이란 법칙이 대선을 지배하기 1년여 앞서 한 권의 책이 번역되었다. 이 책은 ‘미국의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라는 부제가 달고, “미국 민주당원들이 이 책을 몇 년 전에만 일었어도, 오늘날과 같은 꼬락서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백안관에서도, 의회에서도, 법원에서도 밀려났다...”는 문장의 추천사(하워드 딘 Howard Dean, 한때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 현재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로 시작한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가 쓴 이 책의 제목은 바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이다.

태평양을 건너 여의도 정가에서 너무도 ‘열독’되었다는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은 반드시 자기의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 유권자를 설득하는 정치적 기술 혹은 법칙으로서의 프레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잘 훈련된 한나라당의 대선원정대는 유려한 언어적 기술을 선보이며 역설적이게도 미국 민주당원들을 위한 지침서였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프레임 법칙을 훌륭히 이행했다.

프레임은 설정과 인지의 게임이다. 먼저 존재하는 프레임을 부정하려면 우선 그 프레임을 떠올려야 한다. 대운하, 경제, 실용으로 이어지는 이명박 프레임에 맞서 열차, 평화, 중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운하는 아닙니다”, “저도 경제를 압니다“, ”저도 실용입니다“라고 떠들어야 하는데, 이는 상대의 프레임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수행 할 뿐이다. 상대방의 프레임을 재구성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네거티브는 어떠했는가? 그것은 오히려 상대의 가치와 지지를 강화시키는 부메랑이 될 뿐이었다.

프레임을 장악하지 못함으로서 패러다임 교체를 막지 못했던 오만한 정권은 패배했고, 이명박 정부는 압승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그 만찬의 현장에서도 <고ㆍ소ㆍ영>은 단연 돋보인다. 어느 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좌익 원칙주의자에서부터 전향한 마르크시스트를 거쳐 신세대의 오렌지족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대중문화를 얘기하’던 때의 바로 그 스타 <고ㆍ소ㆍ영>이 귀환한 것이다.

변칙 : 고소영과 신세대 담론

바야흐로 90년대는 문화의 시대였다. 어느 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그땐, “좌익 원칙주의자에서부터 전향한 마르크시스트를 거쳐 신세대의 오렌지족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대중문화를 얘기하”던 때였다. 대중문화의 급속한 확산과 이에 대한 열광적 지지는 문화적 실천의 새로운 가능성을 상징했고 그것은 한 때였지만, 자율적으로 사회적 정체성을 획득한 자들의 문화적 취향이 새로운 사회의 잠재력이 될 수 있음에 가슴이 설레던 시간이었다. 그 핵심에 ‘신세대 문화론’이 있었다. 신세대 문화론은 기존 문화적 실천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으며 새로운 문화담론을 제시함으로서 세대문화 논쟁을 요구했다. 국내 문화연구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그 당시 고소영은 신세대 담론을 주도했던 핵심 아이콘으로 기능했다. 고소영은 93년 방송된<엄마의 바다>에서 ‘경서’역을 통해 신세대 이미지와 정확이 일치하는 ‘고소영족’이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기존의 여성적 이미지를 전복하는 ‘섹시한 악녀’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군림했다.(아, 나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했던「비트」는 또 어떠했는가?) 악녀와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반전통적 불순 세력, 사회의 위험요소로 분류/금기시 되던 낙인은 고소영과 신세대 담론에 이르러서야 해제되기 시작했다. 가부장적 구질서에 순종하는 굴복보다는 이를 치받는 탈관습이 새로운 세대의 매력으로 이야기되었다.

물론, 흘러간 이야기이다. 한참 후에야 그것이 본격적 소비문화의 출현 시점의 열기였을 뿐이었으며, 정치적인 환경에서 양육되었지만 정작 정치적 연령이 되어서는 정치를 잃어버린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일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고소영 역시 과잉된 비평을 초라하게 만들며 ‘당신에게 아파트는 무엇입니까?’를 묻는 고급 소비상품의 모델에 충실한 길을 걷고 있다.

이토록 소비문화의 감수성에 충만했던 신세대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실직했던 IMF때 벤처붐의 기회를 독식하고, 이전의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IT 감각으로 펀드까지 삼키며 순항 중이다. 물론 지금은 바로 아래 세대들을 착취하는 환경에 동조하거나 전혀 관심이 없는 방관자의 삶을 살고 있다. 고소영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신세대들은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구질서에 흡수되었고, 정치를 저주하며 경제 만능의 ‘승자 독식의 시대’를 위해 복무하는 기성세대가 되었다.(그래서였을까, 한 동안 고소영도 거의 모든 CF를 독식했었다.)

논리 : 개념에서 소외된 이 여기 붙어 말을 보태자!

이번 <고ㆍ소ㆍ영>의 귀환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말들의 전성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범박한 논리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개념(행동과 실천의 토대가 되는 이성적 인식)이 고려대라는 학연주의, 소망교회라는 신심, 영남이라는 지방 패권임을 알았다. 학연주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88만원 세대, 십일조 할 돈조차 빠듯한 비정규직, 지역과 패권에에 이기심이 없는 글로벌 시민이 우선적으로 개념의 소외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 한겨레 2월15일자 1면.
두 번째, 그러니까 실천의 문제가 훨씬 어렵긴 한데... 패러다임이 바뀌니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옷을 갈아입은 새로운 프레임들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참여정부의 ‘코드’ 프레임은 ‘스타일’ 프레임으로 바뀌었다. 미디어는 스타일은 그냥 스타일일 뿐, 존중하잖다. 히피든, 여피든, 힙합이든 어떠하랴, <고ㆍ소ㆍ영>은 그냥 이명박의 실용 스타일이란다. 불과 한두 달 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성숙한 프레임이 패러다임 교체를 통해 생성됐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프레임 역시 ‘경제만 살리면 되지’ 프레임으로 바뀌었다. 운송용도 관광용도 아닌 대운하면 어떤가? 경제만 살리면 되는데. 친재벌, 과거불문, 지역 편중, 종교 편향이면 어떤가?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데...

이 부분은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일단의 몫이다. 경제와 기업을 표방하는 정권이 들어서는데 왜 경제 지표와는 인관 관계가 발휘되지 않고 부동산 값하고만 인과 관계가 생기는지, 영어를 할 줄 알면 돈도 많이 버니까 영어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것이 어떻게 사교육비를 줄일 수 있는지, 대운하가 보호하는 환경이 우리가 생각하는 환경이 맞는 것인지 뭐 등등 이다. 한심한 수준들로 인해 ‘말들의 전성시대’가 일찍 개막되었지만, 아직 시즌 초이다. 약간의 시간을 갖고 실천의 행태를 지켜보며 말들을 보태면 된다. 자신이 믿는 바를 말하는 것이 실천이니까.

학교라고 믿었던 사회운동을 휴학하고 몸을 더듬어보니 라이타 한 개밖에 없더라는 싸구려 열정에 여전히 감격하는 청년 백수. 을용타에 열광하는 청년 백수들이여,라이타(right-打)하라! 오른쪽을 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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