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를 몰랐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인수 박사는 4.19 유족들에게 사과를 하겠다며 이렇게 밝혔다. 4.19관련 단체들이나 유족들에게 직접 한 얘기는 아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덧붙여 그는 "대한민국 건국의 자유민주주 정신과 4.19의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정신은 한 뿌리"라고 했다.

이인수 박사는 지금 홀로 '하얀 까마귀'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려 했던 혁명의 정신이 곧 이승만의 정신이기도 했다는 그의 말은 역사 재평가의 한 장을 열어젖힌 것이다. 기막힌 정신승리법이다. 이인수 박사의 논법대로라면 역사의 구분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의 논법이라면 새마을 운동의 정신이 곧 민주화 운동의 정신이었고, 체육관 선거의 정신이 곧 광장의 데모였다고 한들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의 사과를 4.19 단체들은 일축했다. 4.19 국립묘지를 찾은 이인수 박사를 쫓아낸 한 4.19 단체 관계자는 "저들은 이승만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고 이승만 기념관을 국민의 세금으로 세워달라는 광고를 대대적으로 낸 다음에 여론이 나빠지니까 오늘에야 사과를 하겠다고 하는 태도를 표명한 것 뿐"이라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의도가 있는 사과, 계산된 참배라는 얘기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가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리동 국립 4.19민주묘지를 나서며 취재진에 둘러싸여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이 박사는 참배를 한 후 4.19 혁명 희생자와 유가족에 사죄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였으나 4.19 단체의 거부로 묘지 입구에서 발길을 돌렸다.ⓒ연합뉴스
이인수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를 몰랐던 이유가 '인의 장막' 때문이라고 했다. 익히 알려진, 그럴싸한 설명이다. 하지만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인의 장막'에 휩싸였다는 이미 알려진 사실 외에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를 정말 몰랐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과관계를 설명하진 못했다. 지난 17일 SBS '8시 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인의 장막'에 갇혔다는 사실의 인과율을 단지 이승만 대통령의 나이에서 찾을 뿐이었다. 그는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연세가 좀 많으시다보니까 주변인물들이 진실을 알려드리지 않은 거죠."

1960년 4.19 혁명 당시에 186명이 죽었고 6400여명이 부상당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승만 대통령이 정말 3‧15 부정선거를 몰랐는지의 여부는 역사적 진실로 평가하면 될 것이다. 백번 천번 양보해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해 4월 19일 이후 벌어진 죽음과 부상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당시 국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

이인수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유족으로서 사과를 할 수 있는 책임과 도의가 있다면, 이뤄져야 할 사과는 바로 이 부분에 관한 것일 테다. 하지만 외려 이 부분에 대해서 이인수 박사는 명확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한 유족은 언론을 통해 발표된 그의 사과에 대해 "사과라기 보단 해명에 가깝다"는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이인수 박사가 이제와 새삼 대체 무엇을 사과하려했던 것인지 의아해지는 대목이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는 전혀 몰랐으며, 4.19 혁명의 정신에 대해선 적극 공감했다고 밝혔다. 책임을 져야 할 일에 대해선 인의 장막 때문에 몰랐다고 밝히고, 자신이 짓밟았던 혁명에 대해선 찬사를 늘어놨다는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이인수 박사가 홀로 '하얀 까마귀'를 보았다며 갑자기 뒤죽박죽의 얘기를 하며 꺼내는 것일까? 그 까닭은 그의 태생적 존재 이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인수 박사는 1961년 8월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건너가고 1년 뒤의 일이다. 그는 자신이 양자가 된 경위를 설명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먼저 양자로 들였던 이강석이 비극적 선택을 한 이후, 전주 이씨 종가에서는 새로운 양자를 찾다가 자신을 추천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 즈음이었고, 이미 대학 교육까지 다 받은 후였다.

지난 2009년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이인수 박사는 "자신이 양자가 된 것은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전주 이씨 문중 원로들의 권유에 따른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가문을 대표했던 정치인의 노후가 불행해진 것을 염려한 문중의 판단이자, 맞춤한 조건을 갖춘 그가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발탁된 것이다. 전주 이씨 가문의 당시 정치적 위세와 시대상을 감안할 때, 그가 양자가 된 것은 일종의 정치 행위이자 정략적 선택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후 그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위상 복원이라고 하는 정치적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예컨대, 지난 2006년 KBS에서 <서울 1945>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대한민국 건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당시 정연주 사장과 드라마 제작진을 고발하며 KBS 수신료 거부에 앞장서기도 했었다. 당시에 이인수 박사는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승리한 나라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이어 받아서 드라마가 제작되었다며, 노무현 대통령을 공산주의 맹신자에 비하며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라고 평가하기도 했었다.

올 해는 사실상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재평가할 수 있는 마지막 해라고 해도 좋다. 이인수 박사는 평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밝혀왔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박정희를 평가하며, "박정희가 국부라고 하는 것은 '너무한' 거짓말", "일제에 충성한 박정희" 등의 표현으로 박정희 시대를 비난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부각하기 위한 어법이겠지만, 바로 그 박정희의 딸이 유력한 미래 권력인 상황에서 그의 어법은 스스로를 이명박 시대에 이승만 재평가를 끝내야 한다는 강박에 몰아넣은 것처럼 보인다.

▲ 19일자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장지연 서훈을 박탈한 이명박 정부를 김 고문은 "기회주의적, 무개념, 멍청"등의 원색적 표현으로 맹비난했다.
조중동이 수년 전부터 '이승만 띄우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얕게는 친일파에 뿌리를 둔 정체성에 대한 탈색 작업을 위한 것일 수 있겠고, 보다 깊게는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환기하며 '이승만 띄우기'에 반대하는 세력을 '친북주의자'로 덧씌우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오늘 자(19일)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이 칼럼을 통해 장지연의 훈장을 박탈한 이명박 정부를 "기회주의적, 무개념, 멍청"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원색적으로 비난 한 것은 친일 문제에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 언론의 상층부가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신경질이었다.

이인수 박사 또한 피해자일 수 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연세가 좀 많으시다보니까 주변인물들이 진실을 알려드리지 않은 거죠"라고 말했다. 올 해 여든이 된 그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후에야 양자가 된 이인수 박사가 마치 옆에서 지켜본 사람인 것처럼, 단지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이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를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쩌면 이인수 박사 역시 '인의 장막'을 의심해봐야 할지 모른다. 그를 앞세워, 이승만을 재평가하자고 부추기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은 왜 하필 지금 이승만을 말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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