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이다. 이 문구는 집주인을 만나지 못한 택배기사들이 집 앞에 남겨두고 오는 메모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Sorry We Missed You'라는 제목에 무릎을 치게 된다. 우리 말 '미안해요'라는 한 마디로 담을 수 없는 '처지의 유감, 난처함, 상황의 공교로움, 난감함 그리고 삶의 처연함'을 저만큼 표현한 문구가 있을까란 생각이 든다.

진퇴양난, 고립무원, 설상가상, 삶의 딜레마에 빠진 리키. 하지만 그건 그저 리키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 노동의 문제임을 영화는 명확하게 짚어준다. 1936년 찰리 채플린이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기계문명 앞에서 유린당한 노동자의 삶을 형상화시킨 이래 한 세기가 흘렀지만, 노동자의 삶은 또 다른 '시스템'의 컨베이어 벨트 속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켄 로치는 강변한다. 시스템이라는 말로 우리를 겁박하고 있는 첨단 자본주의 체제, 1936년의 컨베이어 벨트, 그 21세기 버전에 우리는 이미 너무 익숙하게 길들어져 있는 건 아닐까.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 이미지

실제 배관공으로 20년째 일하고 있는 크리스 히친이 분하여 더욱 실감 나는 연기를 보여준 리키. 그는 2008년 금융위기로 실직을 한 후 온갖 막노동 일을 전전했다. 영화는 리키가 자신의 전력을 택배회사 인터뷰에서 술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이제는 집적거리는 상사도 없고, 자신이 책임질 일을 하고 싶다는 리키. 그런 리키에게 택배회사 매니저는 이 일이야말로 바로 당신이 찾던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맡은 택배를 스스로 책임지는 '개인사업자', 그 말에 솔깃한 리키는 이동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아내의 차를 팔아 덥석 택배용 차까지 마련하고 택배 일에 뛰어든다. 출근 첫날, 옆 차의 동료가 친절하게 빈 물병을 주며 소변용이라고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는 말에 욕을 하며 차 안으로 던져 넣은 리키. 그는 그렇게 의욕적으로 자영업자로서의 일을 시작한다.

<미안해요, 리키>가 다루고 있는 건 바로 '긱 이코노미(gig economy)'이다. 여기서 gig은 일시적인 일을 뜻하며,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 계약직이나 프리랜서 근로 형태가 확산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한다. 2019년 영국, 미국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긱 이코노미. 포브스에 따르면 2020년까지는 직업의 43%까지 확산될 예정이라고 한다. 장점은 영화에서처럼 '자신이 책임지는 자신만의 일'에 걸맞은 유연한 근무시간과 한 직업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직업 형태이지만, 정작 현실은 불안정한 수입에, 기업의 편의적인 고용으로 인한 일자리 축소이다. 멀리 갈 일 없이, 오늘도 우리 동네 골목골목 동분서주하는 택배기사의 영국 버전이 바로 리키이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 이미지

그런데 말이 자유이지, 현실은 '택배 단말기'에 얽매인 쉴 틈 없는 노동이다. 노동자가 자리를 2분만 비워도 울려대는 단말기. 택배 물품을 단말기에 입력하는 순간부터 배송완료 사인이 이루어지기까지 매 순간 노동자를 제어하는 시스템. 결국 ‘내 사업'이라는 말에 덥석 택배 사업에 뛰어든 리키, 어서 빨리 빚을 갚고 아이들과 지낼 집을 마련하겠다는 욕심에 껴안은 리키의 현실은 하루 14시간 6일간 쉴 틈 없는 쳇바퀴 같은 노동의 현장이다. 결국 동료가 쥐어 준 물병이 얼마나 고마운 배려인가를 알게 하는.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 분)라고 다를 게 없다. 일 때문에 이용했던 차마저 남편의 택배용 차를 위해 판 그녀는 버스를 타고 일하는 곳을 전전한다. 일하는 시간은 늘어 어린 딸의 저녁마저 챙겨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급여는 달라지지 않았다. 거기에 규정된 업무, 늘 빗나가는 상황, 그럼에도 자신의 어머니처럼 돌봐드리고 싶은 그녀의 정성 된 마음은 언제나 엇물린다. 늦은 저녁 돌아온 부부, 이 부부에게 부부다움이란 겨우 왕왕거리는 TV 앞에서 겹쳐지듯 나란히 잠든 그 순간이다.

리키 가족의 안타까운 현실

<미안해요, 리키>는 켄 로치 감독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이어 영국 사회 시스템을 '저격한’ 두 번째 영화이다. 칠순의 나이, 심장병으로 그동안 하던 목수일을 하지 못하고 실업 급여를 받고자 했던 다니엘 블레이크. 하지만 다니엘 블레이크의 그 '소박한 소망'은 기계적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영국 의료보험제도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노정하고 만다.

하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것은 영국 의료보험제도 비판이라는 씨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70 평생 노동으로 삶을 일구어온, 완고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노동자의 모습을 영상으로 설득력 있게 구현해 냈기 때문이었다. 그저 한 70 먹은 노인이 아니라, 평생 성실하게 노동을 해온 한 사람이 시스템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게 '전사'하는가를 영화는 호소력 있게 보여주었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 이미지

<미안해요, 리키> 역시 ‘긱 이코노미’ 시스템에서 택배 노동자가 된 리키와 그의 가족의 삶을 곡진하게 그려내며 영국 사회 시스템의 그늘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많은 빚이 있지만 어떻게든 가족과 함께 잘살아보려는 가장 리키, 하지만 역시나 낯선 시스템 앞에서 리키는 무기력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쉬지 않고 일하며 그 시스템의 일원으로 최선을 다하려는 아버지 리키, 당연히 그런 리키와 아내의 소망은 아이들이 잘 커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융자를 껴안으며 대학을 나와 무엇을 하냐며 그 반항심을 뜻이 맞는 친구들과 그래피티 예술 행위를 하는 것으로 풀어내려는 아들. 당연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심지어 그래피티에 필요한 스프레이를 사기 위해 절도까지 한 아들에게 돌아온 건 정학이다. 그런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는 결국 손찌검까지 하며 이 가족의 갈등은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문제는 아들이 정학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심지어 택배 물품을 도난당하고 린치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그 모든 것을 '개인사업자'로서 리키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 그 하고 싶다던 '자신의 사업'이 외려 가족 간의 갈등 상황 속에서 리키를 옥죄어 온다. 단 하루를 쉬어도 엄청난 벌금을 부담해야 하고, 도난당한 물건도 파괴된 단말기도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 일을 할수록 빚만 늘어가는 상황에서 리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말리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택배 트럭을 몰고 나가는 것뿐이다. 그래도 가장이기에 아버지이기에.

영화는 긱 이코노미 프레임 속의 노동자가 놓인 '한 끗'의 위기를 리키 가족의 상황을 통해 절박하게 표현한다. 리키는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의료보험 공단 사무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마지막 장면 리키의 모습은 다니엘의 죽음 못지않게 처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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