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일부 내용이 있습니다.

[미디어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흙투성이가 된 세종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세종이 타고 가던 가마가 이동 중 망가졌기 때문. 이 가마를 제작한 총책임자는 세종의 총애를 받던 장영실이었다. 세종이 타고 가던 가마가 부러지는 영화 초반부 장면은 러닝타임 1시간 15분에 한 번 더 재연된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임금의 가마가 망가진 사건이 일어난 다음 가마 제작의 총책임자였던 장영실을 파직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영화다. 탁월한 멜로 연출로 유명세를 탄 허진호 감독은 세종과 장영실, 두 사람의 우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이 영화의 장점은 ‘조선의 주체성’을 강조한 점이다. 조선과 명 당시만 해도 하늘에 있는 별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고, 천체의 움직임을 시간 단위로 구별해 계산하고 측정하는 기준은 명나라만이 갖는 특권이었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 이미지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역법이라는 ‘스탠다드’는 명나라만이 갖는, 엄밀히 표현하면 천자, 하늘의 아들인 중국의 왕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권한이기에 그렇다. 그런데 이런 사대주의 질서에 세종은 과감하게 반기를 들었다.

조선과 중국 현지의 시간도 맞지 않는데 하물며 명이 반포한 역법이 조선에 맞을 리가 없다. 장영실을 통해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기구인 ‘간의’를 만들게 하고, 태양과 달 및 다양한 별들의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를 만들도록 세종이 지시한 까닭은, 명나라가 반포한 역법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세종이 간의와 혼천의를 만들도록 지시한 까닭은 사농공상, 선비 다음으로 농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조선에서 농민을 장려하기 위한 위민정책이란 측면도 있지만, 명이라는 천자가 하사하는 역법에 의지하지 않고 조선만의 역법을 추구해 ‘조선의 주체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세종대왕에게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 장점만 있는 영화는 아니다. 세종 당시 조선은 명이란 사대주의 질서에 포획된 국가였다. 그럼에도 세종은 명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명에게 할 말은 할 줄 아는 군주였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 이미지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조선의 처녀를 명에 조공으로 보내는 그동안의 악습을 폐지한 장본인은 세종이었다. 세종은 외국에 조선의 처녀를 바치는 공납 문제를 없앴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괴롭히던 여진족 정벌을 위해 명에게 조선의 군대가 국경을 넘을 것을 명에게 요청한 자주적인 군주였다. 세종이 명의 사신이 보는 앞에서 장영실이 만든 간의를 철거하는 영화적 설정은, 조선의 주체성을 강조해온 세종의 통치 철학과는 맞지 않는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3월 16일의 기록을 보면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를 감조(監造)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고 저술돼 있다. 세종의 가마가 부러진 건 세종 24년 봄에 일어난 일이다.

세종실록 98권, 세종 24년 12월 26일 기록을 보면 “선공 제조 박종우·이사검과 성원군·이정녕을 불러 별궁을 후원에 짓기를 의논하고는, 이내 명하여 간의대(簡儀臺)의 동쪽에 집터를 보게 하고, 마침내 간의대를 그 북쪽에 옮기게 하였다”고 저술돼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세종 24년엔 간의대를 옮기기만 했지, 철거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에선 명의 사신이 보는 앞에서 간의대를 철거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하나 더, 영화 후반부 들어 세종은 아버지가 입던 검은 곤룡포를 입는다. 태종이 검은 곤룡포를 입을 땐 궁정에 피바람이 부는 걸 예고했다. 영화에서 세종은 무언가 중요한 결단을 내릴 것처럼 검은 곤룡포를 입지만 용두사미로 마무리한다. 문무대신 조말생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등장하지만 그 역시 용두사미로 퇴장한다.

허진호 감독은 역사에 상상력을 가미한 ‘팩션’ 사극을 ‘덕혜옹주’에 이어 연이어 내놓았다. 역사 소재 영화를 접할 때 관객은 역사에 정통하지 않은 한 어떤 부분이 사실이고, 어떤 부분이 허구인가를 구분하기 쉽지 않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 ‘나랏말싸미’처럼 대중 정서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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