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고등학생 때부터 남북의 평화선언을 간절히 바랐다. DMZ에서 양국의 최고지도자가 두 손을 맞잡고 평화선언을 낭독하는 순간이 아니면 유투(U2)를 한반도에서 볼 일은 없으리라 확신했다. 확신의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동경과 체념이 뒤섞인 확신의 유통기한이 2019년 12월 8일 오후 7시까지일 줄은 20년 전의 고등학생은 알 수 없었다. 유통기한의 마지막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고척돔을 찾았다.

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록밴드 U2가 8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역사적인 첫 내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연합뉴스)

오후 7시 20분. 조슈아트리 투어의 인트로곡으로 쓰이는 The Whole of the Moon이 두 번 재생됐다가 끊겼다. 공연장을 가득 채운 2만 8천명의 아쉬움과 어색함이 돔을 휘감는 순간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We don`t need an introduction! We are gonna make our own introduction!“
(우리는 소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만의 소개를 할 것이다!)

유투의 리더이자 보컬 보노(Bono)의 일성(一聲)이었다. 돌출무대에 멤버들이 등장하자 수류탄이 터지는 것 같은 래리(Larry Mullen, Jr)의 드럼이 폭발하며 첫 곡 ‘Sunday bloody Sunday’가 시작됐다. 1972년 1월 30일 영국군이 북아일랜드의 비무장 시위대에게 발포해 14명이 죽고 13명이 다친 ”피의 일요일“을 다룬 사회참여 밴드 유투의 대표곡이다.

이어 유투를 알린 히트곡 ‘I will follow’. 2000년대에도 밴드의 건재함을 증명한 ‘Beautiful day’가 연달아 연주됐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모하는 ‘Pride(in the name of love)’에서는 사망일인 4월 4일 대신 12월 8일로 가사를 바꿔 불렀다. 첫 내한 공연일이자 존 레논의 기일이다.

그렇게 공연의 1부가 끝나고 멤버들이 차례차례 가로 61m, 세로 14m의 거대한 스크린에 새겨진 여호수아 나무 실루엣 아래 모였다. 스크린이 점차 붉게 물들었고 관객들의 함성이 커지자 보노는 또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록밴드 U2가 8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역사적인 첫 내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연합뉴스)

”In time of Terror, Keep us tolerate. In time of fear, Keep us faithful...“
(테러의 시대, 관용을 간직합시다, 공포의 시대, 신의를 간직합시다)

화면이 전환되며 동명의 폭격기가 착륙하는 듯한 영상이 재생되며 끝없이 뻗은 도로와 광활한 대지가 스크린에 펼쳐졌다. 그리고 지평선 너머에서 들리는 게 확실한(!) 디 엣지(The Edge)의 몽환적인 기타리프와 함께 Where the street have no name이 연주됐다. 이번 투어의 주제이자 유투를 세계적인 밴드로 격상시킨 명반 ‘조슈아 트리(Joshua tree)’ 앨범의 1번 트랙이다.

여운이 가라앉기도 전에 잔잔하게 가슴을 건드리는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이 이어졌다. 최고 발라드 곡으로 꼽히는 ‘With or without you‘에서는 관객 모두가 후렴구를 열창했다.

’Bullet the Blue Sky’에서 ‘Mothers of the Disappeared‘로 마무리되는 조슈아 트리 앨범의 후반부는 유투 공연이 무엇 때문에 세계 최고로 꼽히는지 증명하는 데 아쉬움이 없었다. 곡마다 매번 바뀌는 세심한 배경영상. 미디어아트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효과들은 콘서트를 음악의 범주를 뛰어넘어 종합예술로 승화시켰다.

미슐랭 3스타의 기준은 ’식사를 위해 여행계획을 세울 만한 식당’이라고 한다. 팬심이 아니라도 유투의 공연은 오로지 공연관람만을 위해 여행계획을 세우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한다.

”우리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

히트곡 메들리였던 3부는 유투가 월드클래스 공연 장인(匠人)을 뛰어넘어 묵직한 감동을 선사하는 월드베스트 예술가인지 또렷하게 각인시키는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한 것처럼 ‘Ultra Violet(Light My Way)‘의 연출은 커다란 감정적 울림을 넘어 하나의 문화충격이었다. 다음은 ‘Beatiful day’가 끝난 후 ‘Ultra Violet(Light My Way)‘이 시작되기 전 보노의 멘트다.

When human rights drown out human wrongs that's a beautiful day.
인권의 가치가 인간의 악함을 몰아내는 그 날이 아름다운 날일 거예요
When sisters get to go to school like their brothers that's a beautiful day.
딸들이 아들들과 같이 학교에 갈 수 있게 되는 날이 아름다운 날일 거예요
When the place you live is the place you want for your home that's beautiful day.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진정 집으로 느껴질 때 그 날이 아름다운 날일 거예요
When women of the world unite to rewrite ‘history’ as ‘herstory’ that is a beautiful day.
전 세계의 여성들이 (남성의)역사를 (여성의)이야기로 다시 써내려 가는 날, 그 날이 아름다운 날일 거예요
When women of the world unite to rewrite history as her story that is a beautiful day, is it not?
전 세계의 여성들이 남성의 역사를 여성들의 이야기로 다시 써내려 가는 날, 그 날이 아름다운 날일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세계역사 속 여성인물들을 차례차례 조망한 무대영상에서 나혜석 작가, 이태영 변호사, 김정숙 여사, 박경원 파일럿, 서지현 검사, 홍은아 심판,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이수정 교수. 제주도 해녀들 그리고 설리가 스크린에 비쳐졌고 곡이 끝남과 동시에 스크린에 ”우리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는 한글 문구가 떴다.

후일담이지만 한국관계자들도 등장인물에 대한 정보를 몰랐다고 한다. U2측에서 SNS와 설문조사를 통해 직접 선정했다는 점은 내한한 뮤지션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보노는 남북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며 대망의 마무리로 ‘One’을 택했다. 누구나 예상한 엔딩곡이었지만 기대 이상의 하나된 목소리가 고척돔을 메우며 공연이 끝났다.

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록밴드 U2가 8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역사적인 첫 내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연합뉴스)

유투의 진부한 메시지들?

너무 당연한 음악이라 관심이 사라질 때가 있다. 남녀가 극적으로 상봉할 때 흘러나오는 사라 본의 Lover’s Concerto. 역경에 직면한 주인공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나오는 조쉬 그로반의 You raise me up. 음악만 들어도 장면이 연상되는 ‘흔해 빠진 클리셰'라며 진부해하는 음악들.

그러나 막상 그 음악이 빠진 자리를 대체할 음악이 마땅찮다는 걸 알았을 때 혼란에 빠진다. 머리를 짜내고 수많은 곡을 찾다보면 비슷한 걸 찾아내긴 하겠지만, 누구나 느끼는 그 감상, 그 분위기를 똑같이 재현해내기는 불가능하다. 43년간 유투가 음악으로 전해온 메시지도 진부한 클리셰다. ’다른 사람이 나를 정의할 수 없다‘, ’관용과 신의로 공포의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평등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다’.

하지만 유투의 공연이 끝나고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의 대체제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이 진부한 클리셰가 가진 대체 불가능함이 유투의 본질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 본질이 훼손되지 않는 한 유투의 인기는 이어질 거란 확신이 든다. 이번 확신의 유통기한은 정말 만년으로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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