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 부뚜막에 먼저 오른 고양이 ★★★★☆

고흐가 귀를 자른 까닭은?

마침내 국내에도 개봉한 <블랙 스완>을 보면서 몇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첫 번째는 일전에 박스 오피스 소식에서 <블랙 스완>의 줄거리를 전하며 말씀드렸던 영화 <쇼걸>입니다. 폴 버호벤에겐 재앙과도 같은 영화로 남은 <쇼걸>은 라스베가스의 특급 호텔에서 펼쳐지는 쇼를 무대로 삼았습니다. 이곳에서 주인공 자리를 놓고 두 여자가 살벌한 경쟁을 벌인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죠. 라스베가스가 배경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경쟁은 끝내 도를 넘어서 추악한 경계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중간에는 쇼의 마스터인 남자를 유혹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려고도 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중학생 시절 한 선생님으로부터 전해들은 고흐의 일화입니다. 고흐의 자화상은 여러 점이 있지만 그 중에서 잘린 귀를 붕대로 감싼 채 그린 작품이 있죠? 그것을 두고 당시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절친 고갱이 그림을 보고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평하자 화가 나서 그만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라 그림에 붙였다고, 그러면서 "자, 이제 그림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라고 물었다더군요. 예나 지금이나 저는 미술에 문외한이나 다름없지만 이 이야기는 도무지 잊히질 않았습니다. 그만큼 충격적이고도 인상적인 이야기였어요.

세월이 한참 흘러서야 고흐의 잘린 귀에 얽힌 설이 분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은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더군요. 사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제 기억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나마 비슷한 것은 있었습니다. 고갱이 귀가 틀리다고 하자 똑같이 그렸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귀를 잘라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고흐가 자른 건 정확히 말해 귓불이라고 하니 둘 다 틀린 것이 되겠지만, 저는 여러 설 중에서 이 두 가지가 가장 맘에 듭니다.


The Dark Side of the Desire

<블랙 스완>은 2008년에 <레슬러>로 호평을 받았던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신작입니다. 그는 이번에도 한 인물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내면에 잠재해있던 욕망을 스크린에 그려냈습니다. <레슬러>가 꿈을 좇다 만신창이가 된 남자의 후일담에 가까운 이야기라면 <블랙 스완>은 서서히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레슬러>가 꺼지지 않는 꿈과 열정에 대한 찬가라면 <블랙 스완>은 꺼지긴커녕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오른 욕망에 산화된 자를 기리는 장송곡입니다. 그래서 <블랙 스완>은 한층 더 처절하고 격정적이며 침울합니다.

이렇듯 두 영화로 대차대조표를 그릴 수 있지만, <블랙 스완>은 <레슬러>보다 족히 몇 배는 뛰어난 영화입니다. 폄하의 의도는 결코 아니나 <레슬러>는 보편적인 드라마에 의지하고 있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과거의 아카데미 위원회가 그러했듯이 일반 관객들도 감동을 주는 '인간 승리'류의 이야기에 취약한 편이죠. 그런 면에서 <블랙 스완>이 흡수할 수 있는 관객층은 상대적으로 협소할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블랙'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처럼 어둡고 우울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싸이코 스릴러 혹은 호러에 가까울 정도로 오싹한 연출이 수를 놓기도 합니다. 그렇게 감독은 전작보다 훨씬 능수능란한 기교를 선보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끄집어내고자 캐릭터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입니다.

<블랙 스완>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늘어난 고무줄처럼 긴장감으로 꽉 차있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관능적입니다. 모골이 송연해지게 만드는 공포가 있고, 그 공포를 관객에게 전염시키는 '다크 포스'로 가득합니다. 그런가 하면 시종일관 무시무시한 응집력을 선보이던 에너지는 곧 터질 것만 같은 핵폭탄을 연상시킵니다. 때문에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마치 'Doomsday Clock'을 지켜보는 것 마냥 마음을 졸이게 됩니다. 후반부의 초현실주의적인 연출은 아주 조금 과하다고 느꼈지만, 전반적으로 이를 만회하고도 남는 멋진 작품입니다.


감출 수 없는 인간의 욕망

영화는 니나가 그토록 염원하는 '백조의 호수'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올라 열연하는 꿈으로 시작합니다. 그녀는 발레단에서 몇 년째 작은 역할에 만족하면서 지내야만 했죠. 꿈을 정의하는 표현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무의식에 내재된 욕망의 반영"임에 비춰볼 때, <블랙 스완>은 처음부터 캐릭터의 특성이나 영화의 지향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바로 어머니에 의해 억압되고 통제를 받고 사는 니나의 내면에 간직한 숨은 욕망입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따르면 인간은 수면에 이르면 이성의 기능이 미약해지거나 혹은 정지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꿈속에서 법은 물론이고 윤리와 도덕 등에 구애받지 않고 보다 과감한 행동을 합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깨어있을 때 누구보다 냉철하고 모범적인 사람조차 꿈에서는 변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가식적인 사람이라거나 위선자라고 비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자아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이성의 존재유무라는 말처럼, 다만 우린 그것을 이성으로 억누르며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니나와 에리카

<블랙 스완>의 니나 또한 그렇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발레에 대한 열정이 강해 새로이 물색하고 있는 '백조의 호수'의 주연을 갈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수하고 연약한 백조와 사악하고 도발적인 흑조를 동시에 연기해내야 합니다. 하지만 홀어머니 밑에서 금지옥엽으로 키워진 니나는 백조로는 적역이나 흑조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심리나 성향 등이 평상시의 그녀와는 동떨어진 것이라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죠. 이를 잘 알고 있던 공연감독 토마스는 더 잘 할 수 있다는 니나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 한마디에 니나는 그저 낙담하고 돌아섭니다. 꿈에서는 숨김없이 열망을 드러냈지만 현실에서는 적극적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니나를 이렇게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며 미약한 '아이'로 만든 것일까요? 바로 그녀의 어머니 에리카입니다. 그녀 또한 과거에는 유능한 발레리나였으나 젊은 나이에 니나를 갖게 되어 꿈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즉 에리카는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딸에게 대물림하고 그것을 실현하여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덧 성인이 된 니나지만 여전히 어린 소녀를 다루듯 애지중지하는 과잉보호도 그 꿈을 위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니나도 어머니의 바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잘 알기에 그 기대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아이와도 같습니다. <블랙 스완>에서 이러한 니나의 성향이 여실히 드러난 장면이 있습니다. 딸이 마침내 주연을 꿰찼다는 소식에 에리카는 케이크를 준비합니다. 허나 기대와 달리 니나가 달가워하지 않자 무용지물이 됐다며 버리려 합니다. 이를 본 니나는 곧장 잘못했다고 하며 어머니의 비위를 맞춰줍니다. 아울러 토마스의 조언(?)을 듣고 자위를 하던 중에 침대 옆에서 잠든 어머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도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토마스와 릴리

어머니가 니나를 억압하고 옥죄던 독재자의 역할이라면, 토마스와 릴리는 그녀를 해방시켜주는 촉매제의 역할을 합니다. 먼저 토마스의 경우에는 자신을 독대하러 왔다가 소심한 의지만 내비치고 돌아가려던 니나를 몰아세우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고작 이러려고 찾아 왔냐, 내 마음을 바꾸려던 것이 아니냐, 넌 백조로는 이상적이지만 흑조는 불가능하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 수년간 널 지켜봤지만 항상 완벽을 기하고자 노력하는 반면에 단 한번도 자신을 내려놓지는 못 하더라"라며 정곡을 찌릅니다. 유능한 감독답게 토마스는 니나의 내면을 완전히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죠.

토마스의 직언에 니나는 "완벽해지고 싶었다"라고 반론합니다. 이것을 듣고 그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날립니다. "완벽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통제(Control)만이 전부가 아니다" ('Control'이란 단어는 영화에서 토마스의 입을 빌어 니나를 향해 몇 차례 더 나옵니다. 이 단어가 나오는 횟수만큼 니나는 경직되고 속박당한 자아를 지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의 대화를 나누면서도 토마스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그녀를 주연으로 발탁합니다. 대화의 끝에서 강제로 나눴던 키스를 통해 니나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던 욕망이자 흑조로의 가능성을 봤기 때문입니다.

발레단에 뒤늦게 합류한 릴리는 토마스가 니나의 욕망을 끄집어내고자 활용하는 자극제에 더 가깝습니다. 그는 릴리에게서 흑조를 연기하기에 적합한 재능을 발견합니다. 실제로 릴리는 니나 앞에서 거침없이 팬티를 벗고, 쾌락을 위해 남자와 자는 것은 물론이요 마약까지 하며, 무용실에서 담배를 피는 것쯤은 애교인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니나와는 정반대로 자유분방하고 욕망에 충실한, 자신에게 지극히 솔직한 캐릭터죠. 이것을 알고 있는 니나는 주연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에 압박을 받습니다. 결국 이것은 그대로 강박증으로까지 이어져 니나를 파멸로 이끌고 맙니다.


니나 세이무어 = 아나킨 스카이워커

<스타워즈>는 <블랙 스완>을 보며 떠올렸던 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어린 시절의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콰이곤 진에 의해 장래에 포스의 균형을 가져다줄 궁극적인 선의 존재로 지목됐습니다. 그러나 아나킨은 성장해 가면서 도리어 악의 화신인 다스 베이더로 전락했습니다. 왜일까요? 명백히 수도승의 SF 버전인 여느 제다이와는 다르게 그는 인간의 감정, 즉 희로애락을 모두 수용하기를 기꺼이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아나킨은 아미달라와의 결혼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다스 시디어스는 이처럼 욕망에 충실했던 그를 다크 포스에 휘말리도록 부채질했습니다.

<블랙 스완>의 니나 세이무어의 운명도 종국엔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흡사합니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인데다가 좀처럼 욕망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로 빚어진 어긋난 욕망과 충동은 아나킨을 잠식해 끝내 다스 베이더로 변하기에 이릅니다. 아나킨과 니나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욕망에서 파생된 불안을 이기지 못한 탓이 큽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아나킨의 욕망에는 사랑하는 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니나는 보다 완벽해져야 한다는 예술적인 욕망이 자기파괴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쇼걸>과 <블랙 스완>이 같으면서도 다른 점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둘 다 욕망을 다루고 있지만 전자에 예술혼 따위는 없습니다. 대신에 인간이 가진 욕망의 천박한 본질에 근접해있죠. <쇼걸>의 노미는 완벽을 추구한다거나 예술을 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미와 전임자인 크리스탈 사이에는 시기와 질투, 경계가 난무합니다. 한편 <블랙 스완>의 니나는 예술로서 완벽한 발레를 추구합니다. 니나와 릴리 사이에는 도의(道義)가 있습니다. 다만 니나의 오해가 스스로를 자멸의 길로 인도한 셈입니다. (릴리가 니나를 끌어내릴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성격상 직접적으로 말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또한 <블랙 스완>의 토마스는 <쇼걸>의 잭에 비하면 차라리 니나를 도와주는 조력자에 가깝습니다.

부뚜막에 먼저 오른 고양이

<블랙 스완>의 백조와 흑조는 어쩌면 이중적이고 분열된 내면의 자아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서로 다른 상반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흐도 수십 장의 자화상을 그린 것을 두고 한 사람의 얼굴에서 여러 가지를 엿볼 수 있음을 나타내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술을 먹어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거나, '꿈의 해석'에서 인용한 표현은 그런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의 술과 꿈은 이성을 약화시켜 억제하고 있던 본성이나 욕망을 일깨우는 도구이자 장으로 쓰인 것입니다. 이는 일반적인 경우이고, <블랙 스완>의 니나는 완벽한 예술혼에 대한 처절한 갈구가 갇혀있던 욕망을 밖으로 끄집어냈습니다.

동시에 <블랙 스완>은 이중적이고 분열된 자아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원활하게 해소하거나,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던 니나는 욕망의 표출에 이르러 마침내 통제에서 벗어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의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결과에 가까웠기에 통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그래서 어머니조차도 위험하다며 뜯어말리지만 니나의 폭주는 결코 멈출 줄을 모릅니다. 끝내 니나의 예술을 향한 욕망은 걷잡을 수 없는 광기로 변이하고, 이로 말미암아 백조와 흑조를 모두 완벽하게 해내지만 그녀의 자기파괴는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마치 제 기억 속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랐던 것처럼...

옛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 종종 겉보기와는 다르게 의외로 발칙하거나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두고 쓰는 표현이죠. 그런데 그 고양이가 예전엔 정말 얌전한 고양이였는지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요? 외면이 아니라 내면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덧붙여서 어쩌면 얌전한 고양이로 하여금 부뚜막에 먼저 오르게 만드는 것은, 고양이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우리가 제멋대로 억압하고 가둬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천방지축인 고양이가 맘껏 뛰어노는 동안에도 외부의 시선에 맞추느라 억눌렸던 얌전한 고양이의 욕망은, 기간이 길면 길수록 응축되면서 결국엔 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덧1 ) 유익한 일탈을 적당히 즐기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사는 것은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현실에서 착하고 모범적이었던 학생이 일순간에 부모님을 살해하는 패륜아로 돌변하는 것이나, 성추행범의 절반 가까이가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라는 통계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사회에는 대졸자가 그만큼 많기도 합니다)

덧 2) <레슬러>가 미키 루크의 생애와 오버랩이 되듯이 <블랙 스완> 또한 나탈리 포트만의 그것이 연상됩니다. 아역배우 출신으로 하버드를 졸업한 재원이라는 것까지 더해진 배경이 성인배우로 활동하는 데 분명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그런 그녀의 강박증과 울분을 토해내는 듯한 'SNL'에서의 뮤직 비디오(?)는 웃긴 것 이상으로 눈물겹습니다.

덧3) 그래서 <블랙 스완>에서의 연기는 어땠냐고요? ................................................

덧4) 결말에서 들리는 토마스의 대사 한 마디 - my little princess - 는 언뜻 예술을 향한 허무주의적인 시선이 담긴 듯이 보입니다. 아니면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가지는 위치를 정의한 것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덧5) 역시 결말에 나오는 니나의 대사는 결국 완벽이란, 어떤 형태로든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들립니다.

덧6) 아마도 나탈리 포트만에 가려서 주목을 덜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릴리 역의 밀라 쿠니스의 연기도 상당히 좋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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