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놉시스를 알면서도 정작 짝패 초반 분위기는 그다지 몰입하기 쉽지 않았다. 추노에 이은 전격 민중사극이라는 선언이 무색할 정도로 짝패의 도입부는 엇갈린 귀천의 운명과 주인공 남녀들의 감정 줄기를 심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지와 갖바치 그러니까 조선조의 가장 하층민의 삶을 그리겠다는 의도가 적어도 4회까지는 그다지 도드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딜 보고 이 드라마를 민중사극이라 명명할 수 있는지 분간키 어려웠다.
그뿐 아니라 거지패들 행색 또한 동정심 갖기에는 꽤나 잘 먹고 사는 것처럼 보여 삼정문란으로 도탄에 빠진 하층민의 삶을 형상화하는 데는 아직도 상당히 부족함이 많다. 다만 대부분의 성장형 드라마가 아역분량에서 시청자를 유인하기 어려운데 반해 짝패는 아역들의 분발로 9회부터 등장할 성인 연기자들에 대한 기대감보다 오히려 아역 분량이 짧은 것을 아쉽게 하고 있어 다행인 일이다. 사족 같지만 이런 아역들의 활약은 성인 연기자들의 등장에 큰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이렇듯 민중사극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모호함을 씻는 것과 동시에 후일 성인 연기자들로 전환되는 본격 스토리의 방향성이 6회에 들어 비로소 드러났다. 대단히 전형적인 일이지만 돈으로 고을 현감자리를 산 귀동의 외삼촌은 무리하게 세금을 채근하다 그만 백정 하나를 죽게 만들었다. 죽은 사람에게도 군역을 매겨 세금을 뜯어냈던 것처럼 잡지도 않은 소에 대한 세금을 인정하라고 귀동의 사냥 파트너였던 붓돌아범을 곤장을 쳐 죽이고 말았다.
비록 천인의 피를 타고 태어났지만 그런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양반집 도령으로 자란 귀동의 반응이 그럴 정도면 심지 곧고 사리 판별이 분명한 천둥의 충격과 반응은 더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천동은 개혁의지가 강한 뼛속까지 반골인 강포수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데다가 스승 성치수의 죽음까지 겹치게 되어 거지 주제에 문자를 깨쳐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순진한 이상에서 벗어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온몸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자각을 하게 되는 수순을 밟고 있다.
사실 조선후기 탐관오리들의 수탈은 전혀 새로운 사실도 아니거니와 붓돌아범의 죽음이 대단히 처절하게 그려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애들 연애담이나 뒤쫓나 싶더니 동녀 아버지 성치수의 죽음과 오버랩시킨 붓돌아범의 죽음은 자연스럽게 이 드라마의 방향을 선언하고 있었다. 의적 이야기는 이미 사극에서 많이 등장했다. 임꺽정을 비롯해서 퓨전형식으로 그려냈던 홍길동, 일지매 이야기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렇지만 짝패라는 새로운 의적 이야기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주었다.
홍길동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했지만 짝패의 귀동과 천둥은 친구를 친구라 부르지 못하고, 적을 적이라 함부로 베지 못할 처지가 된 것이다. 단순한 의적 이야기로는 다소 심심했을 수도 있는 스토리에 출생의 비밀이라는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코드 삽입으로 인해 인물간의 관계도는 좀 더 복잡해졌다. 복잡해진 인물들의 성장과 갈등은 시대의 모순 그리고 애정문제까지 또 더해져서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길로 시청자를 안내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통 민중사극을 천명한 드라마이기 때문에 무엇이 중심이 될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짝패는 비로소 민중사극의 자세를 갖췄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고 했다. 사극 짝패를 통해서 현실의 불만을 주먹 꽉 쥐었다 풀었다 하며 후련하게 털어놓는 시간이 될 것 같은 흥분을 갖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