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과 이영표의 축구대표팀 은퇴는 한국 축구에 적지 않은 의미와 과제를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2002년 월드컵 황금 세대의 퇴장입니다. 물론 차두리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시작으로 사실상 2000년대 한국 축구를 책임지다시피 한 박지성, 이영표가 무대 뒤로 퇴장하면서 대표팀의 무게추가 새로운 세대 쪽으로 기울게 됐습니다. 모두 A매치 100경기 이상을 소화하며 한국 축구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선수의 퇴장에 팬들은 아쉬움 속에서도 수고했다는 의미의 격려를 지금도 계속 해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만큼이나 좋은 활약을 펼쳤음에도 잇단 부상, 부진 등을 이유로 서서히 잊혀져 간 '영웅'들도 있습니다. 물론 박지성, 이영표의 꾸준함, 성실함이 워낙 타고났고, 그 덕분에 이뤄낸 다양한 성과와 쾌거들은 당연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똑같이 2002년 월드컵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데 큰 역할을 했음에도 한 순간의 실수, 그리고 부상 및 부진 등으로 이후 내리막길을 걸어 관심에서 멀어진 '또 다른 영웅'들을 보면 뭔가 모르게 마음이 안타깝게만 느껴집니다. 바로 안정환과 설기현, 송종국, 그리고 이천수, 김남일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박지성, 이영표의 대표팀 은퇴를 지켜보면서 문득 이들의 활약상도 머릿속에 떠올라 한번 쯤은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 2006년 독일 라이프치히 젠트랄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컵 G조 한-프랑스전에서 동점골을 성공시킨 후 한국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연합뉴스
앞서 언급한 다섯 명의 선수들은 모두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박지성, 이영표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성과를 냈던 선수들입니다. 안정환은 전 국민이 잘 알다시피 이탈리아와의 16강전 골든골의 주인공이자 미국전 동점골, 그리고 2006년 독일월드컵 토고전 역전골로 결정적일 때 한 방을 터트리는 선수로서 면모를 보여주며 '판타지스타'로 깊이 각인된 스타였습니다. 또 설기현은 이탈리아전에서 역사적인 8강행을 이뤄내는 데 큰 역할을 한 동점골을 뽑아냈던 영웅이었으며, 송종국은 포르투갈전에서 세계적인 미드필더 루이스 피구를 무장해제시키고 3-4위전 터키전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골을 넣었던 또 다른 영웅이었습니다. 그밖에 김남일은 8강 스페인전에서 부상을 입기 전까지 종횡무진 맹활약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파이터형 플레이를 펼쳐 '진공청소기'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숨은 영웅'이었고, 이천수는 '날쌘돌이'와 '당돌남' 이미지로 조커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독일월드컵 때는 토고전에서 절묘한 프리킥골을 터트린 영웅이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잠시 주춤하기는 했어도 박지성, 이영표와 더불어 이들 덕분에 다시 중심을 잡고 세계를 향해 쭉 뻗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다섯 선수 모두 유럽 무대에도 진출한 경험을 갖고 있는데요. 일찌감치 벨기에 리그부터 시작해 성장해 나갔던 설기현을 축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을 전전했던 안정환, 그리고 네덜란드 무대에 잠깐 몸을 담갔던 송종국과 김남일, 스페인, 네덜란드 리그에 진출했던 이천수까지 모두 선진 축구 무대를 경험하고 한국 축구 위상을 높이는 데 어느 정도 공도 세웠습니다. 그리고 나란히 2006년 독일월드컵 본선에도 나서 원정 월드컵 첫 승, 프랑스전 무승부라는 저력을 보여주는 데 큰 역할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들은 나란히 하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탄탄대로를 달렸던 지난 4년(2002-2006년)과 다르게 2006년 이후 이 5인방은 세대교체 바람에 좀처럼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서서히 존재감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다섯 선수 모두 세 번째 월드컵 본선 출전을 위해 노력을 했지만 결국 엔트리 진입에 성공한 것은 안정환, 김남일 뿐이었고 이들마저 안정환은 경기 출장 무산, 그리고 김남일은 조커로 출전하다 나이지리아전 패널티킥 허용으로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아픔을 맛보며 씁쓸하게 대표팀 생활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소속팀도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며 송종국은 중동까지 갔다가 겨우 울산 현대에 복귀하고, 김남일 역시 국내 복귀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중국 리그에 있는 안정환은 이번 한 시즌을 기분 좋게 보낸 뒤 은퇴 시점을 저울질할 전망입니다. 이천수는 바람 잘 날 없는 순간순간을 맞이하다 일본 J리그 오미야에 겨우 둥지를 틀어 '화려한 재기'를 꿈꾸고 있으며, 설기현은 지난 14일 소속팀이었던 포항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다른 팀에서 재도약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돌아보면 내내 화려할 줄 알았던 이들의 선수 생활이 박지성, 이영표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상당히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꾸준한 자기관리가 필요했던 가운데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고비를 넘지 못했습니다. 모두 부상, 이적 문제 등으로 바람 잘 날 없는 매년을 보내야만 했고, 이는 순탄할 수 있었던 선수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축구 선수로서 팬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좋아졌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선수 생활 마무리라도 기분 좋게 하기 위해 이들은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언제 선수 생활이 마무리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들은 여전히 선수 생활을 계속 하고 있고, '유종의 미'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새 시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이천수-송종국 선수 ⓒ연합뉴스
언제까지 '2002 월드컵 타령만 하고 앉아있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마무리는 후배들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지성, 이영표를 통해 이청용, 기성용, 구자철, 손흥민 같은 후배들이 직접 접하고 본받았듯이 이 5인방 역시 화려하지는 않아도 무난하게 자기 역할을 다 하면서 선수 생활을 기분 좋게 마무리한다면 후배 선수들에 귀감이 될 것입니다. 이미 현재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20대 초중반 선수들은 2002년 월드컵을 생생하게 보고 자라며 꿈을 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출발과 과정이 좋았던 가운데서 마무리까지 훈훈하게 끝난다면 후배들 역시 이에 힘을 얻고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5인방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참 중요합니다.

벌써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9년 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배불뚝이 할아버지가 돼서 터키대표팀을 이끌며 역시 지도자로서 마지막 도전을 벌여나가고 있습니다.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묵묵하게 제 갈 길을 가며 결국 도전을 성공해냈던 것처럼 히딩크 감독이나 이들 5인방 모두 그 당시의 기분을 갖고 말년을 기분 좋게 지내면서 '진짜 유종의 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축구사에 박지성, 이영표 뿐 아니라 안정환, 설기현, 송종국, 이천수, 김남일 같은 우수한 선수가 함께 했다는 것이며, 이들이 일궈낸 성과만큼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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