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 - 디즈니에게서 드림웍스의 향기를 맡다 ★★★★

일전에 전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동화의 애니메이션화'에 그치는 디즈니의 작품성향이라는 것도 덧붙였었죠. 유년시절에 읽었던 이야기의 복습이 지금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에 동화를 전복시키거나 풍자하는 듯한 드림웍스, 성인들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를 앞세운 픽사의 작품에는 쭉 관심을 가졌습니다. (혹자는 "픽사도 디즈니인데 무슨 말이냐?"라고 반문하실 텐데, 공식적으로 인수했으니 그건 맞는 얘기입니다. 다만 작품의 정체성에 있어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픽사의 그것은 별개로 보고 싶습니다)

<라푼젤>을 본 건 순전히 미국에서의 평가가 워낙 좋았다는 것 하나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솔직히 말해 <라푼젤> 이전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아요. 어쨌든 미국에서 호평을 받은 건 받은 거고, 저와의 궁합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컸었는데... 상영이 끝난 후에는 "오호라, 디즈니도 이제 진화했구나!"라며 제법 탄복하면서 극장을 빠져나왔습니다. 위험부담을 안기 싫어서 애써 2D로 상영하는, 평소엔 잘 가지도 않는 극장을 찾았는데 정작 보고 나니 3D로 안 본 게 조금 후회가 되네요.

아시다시피 고전동화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성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불러들였죠. 그러나 <라푼젤>은 이것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적잖은 변화가 엿보였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마녀에 의해 탑에 갇혀 산 라푼젤이나, 라푼젤을 구해주는 플린이나 우리가 알던 동화 속의 인물들이 아닙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디즈니를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닙니다.

으레 가련하고 순진무구해야 "아~ 디즈니답구나"라고 할 법한 라푼젤은 차라리 호기심으로 가득한 천방지축에 가깝습니다. 전혀 슬퍼 보이지도 않고 활달하기 그지없어 영화에서 봤음직한, 그러니까 성 안에서 호화로운 삶만 누리다 바깥 세상으로 나와 모든 것이 달라 보이는 공주에 더욱 가깝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푼젤을 탑에서 데려 나오는 남자는 심지어 도둑입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나고 탑을 빠져나와 라푼젤이 태어난 성까지 가는 과정은 디즈니에게 가졌던 편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적어도 <라푼젤>은 '동화의 애니메이션화'에 그쳤던 그 디즈니의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그래서 뭐? 별로 새로운 것도 아니잖아"라며 투덜거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라푼젤>은 디즈니의 작품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라푼젤>은 디즈니의 육체에 드림웍스의 유전자가 가미된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각에서는 디즈니를 두고 지극히 보수적인 집단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여부를 떠나 이렇게 정평이 나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발자취를 보여줬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디즈니가 이만한 변화를 선보였다는 사실은 분명 괄목상대할 만한 일입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라푼젤>이 아주 맘에 드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디즈니에게서 맡은 드림웍스의 향기가 장해서 차마 깎아내리지는 못하겠습니다.

꽤 변화를 줬다고는 하나 <라푼젤>은 변함없는 디즈니표 애니메이션입니다. 즉 여전히 한없이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펼쳐지는 말랑말랑한 동화였습니다. 이는 디즈니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확고한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영화가 블록버스터가 될 필요는 없듯이 애니메이션도 모두 픽사나 드림웍스를 지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또한 일전에 말했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그 나름의 명백한 존재의미와 가치는 가지고 있습니다. 제 취향이 아닐 뿐이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디즈니에게 <라푼젤>의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달라고 항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여기서의 '원작'은 흔히 알고 있는 동화가 아닌 그림형제가 썼던 최초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라푼젤>을 보며 정녕 아쉬운 점은 이 애니메이션이 3D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셀 애니메이션 제작사였던 디즈니가 이제 디지털을 선호하다 못해 2D까지 버렸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세월의 흐름에 적절히 반응하는 것이 순리라곤 하지만, 이러다 2D 애니메이션은 영영 설 자리를 잃고 향수의 대상으로 남게 될 것 같아 우려됩니다.

<라푼젤>은 아이들보다 어른들, 특히 자녀를 둔 부모가 꼭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푼젤을 탑에만 가둬놓은 마녀에게는, 당신의 품안에서 아이들이 벗어나지 못하게 속박하는 우리네 어긋난 부모상이 투영된 것 같아서 말이죠. "이게 다 널 위한 일이야"라고 말하는 건 현실의 부모와 <라푼젤>의 마녀 사이에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아이들을 옭아매고 제어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 라푼젤은 항상 탑에 갇힌 채 저 멀리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풍등을 바라봤습니다. 플린을 압박(?)해 탑을 빠져나온 라푼젤은 풍등을 눈앞에서 간절히 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명당에 자리해 풍등을 보려던 찰나, 라푼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플린에게 묻습니다. 그토록 보길 원했지만 만약에 실제로 보게 될 것이 자신이 그렇게도 꿈꾸었던 것과 다른 느낌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이 얘기를 듣고 플린은 이렇게 답합니다.

"걱정하지 마.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또 다른 꿈을 찾아가면 되잖아"

이것이 진정한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요? 아이들이 세상에 나아가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는 일정선을 넘어서면 부모의 몫이 아닙니다. 평생 옆에서 아이들의 눈을 가릴 처지가 못 되는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고난과 역경을 마주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부여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보호해야 마땅한 존재지만 반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기도 합니다. 행여나 '보호'라는 명목하에서 자유의지를 말살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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