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만능시대, 풍요가 넘쳐 문제인 세상에 굶어죽는 일이 생겼다는 것은 우리 사회 시스템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는 증거입니다. 꿈조차 아직 다 펼쳐보지 못 했던 한 32살 작가의 죽음은 단순히 그녀의 죽음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기에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회 시스템의 집단 사살, 이제 시작일 뿐이다

32살의 나이에 시나리오 작가로서 가능성을 보였던 무명작가가 자신의 집에서 굶어 죽었다는 기사는 황당함을 넘어 당혹스러울 지경입니다. 며칠을 굶어 힘겨운 그녀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옆집 문에 붙여 놓았던 쪽지는 많은 이들을 울게 만들었습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과 김치가 있다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달라"

이런 글을 적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또 했을까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그녀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끔찍한 상황에서 무엇을 봤을까요?

그녀의 죽음을 단순히 한 무명작가의 죽음으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사회 시스템이 온전치 못한 승자 독식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안전장치가 사라지고 소수만을 위한 안전장치가 수십 겹 싸여 있는 사회에서 소수에 끼지 못한 다수는 누구나 그녀처럼 최악의 상황에 몰릴 수 있습니다.

불투명한 제작관행과 조폭식 운영 등 영화계의 구조적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직업의 특성상 그들이 느끼는 문제는 일반인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거대한 산업 구조 속에서 갑의 지위를 가진 이들의 행패가 영화계뿐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비합리로 뭉쳐진 것이 현재 상황입니다.

그런 특수한 제작 환경은 그들을 더욱 고립시키고 화려하게 포장된 이야기는 무모한 꿈을 양산할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화려한 직업을 가진 소수의 스타들에 국한될 뿐 스타를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들은 그저 소모품 정도로 취급될 뿐입니다.

화려한 스타들의 그늘에 가려진 채, 꿈만 먹고 살라고 강요받는 수많은 최고은들은 여전히 현장에서 말도 안 되는 대가를 받아가며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수많은 최고은이 영화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아사 직전의 최고은들이 언제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착취와 지배가 강화되며 소수의 힘은 막강해지는 반면 다수의 가지지 못한 자들은 더욱 열악한 환경 속에 방치되고 있습니다. 재벌들은 착취를 통해 쌓은 막대한 부를 통해 자신들만의 아방궁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도의 갑부 암바니의 1조가 넘는 개인 주택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불합리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빈부 격차가 그 어느 나라보다 극심한 인도에서 가족 다섯 명이 살기 위해 고층의 고가 빌딩을 세운 이 갑부의 행태는 우리 시대 가진 자들의 오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화학업체로 막대한 부를 손에 쥔 그가 쌓아올린 뭄바이의 대저택은 인도인의 피를 빨아 만들어낸 아방궁입니다. 거대한 탑처럼 쌓아올린 아방궁에서 굶주린 인도인들을 내려다보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인도의 암바니는 국내에도 수없이 널려 있고 그들은 비슷한 고민을 할 뿐 함께 행복해지는 방법을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서울시장은 서울시 무상급식 전선을 낙동강 전선에 빗대며 여전히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꿈꾸는 그는 야당이 펼치는 '무상급식'을 막는 것만이 자신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부자들을 위한 종부세와 부자감세만으로 5년간 90조 원이 넘는 세금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전국 학생 무상급식 비용 2조원, 서울시 무상급식 1년 예산 700억이 '망국적 포퓰리즘'일까요?

이건희 손자가 막노동하는 이의 아들과 함께 무상급식을 하는 것이 문제인가요? 어린 시절부터 함께 나누고 어울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값진 경험일 수밖에 없음에도 부자에게 무상 급식을 하는 것이 문제라는 그들의 논리는 그저 정치적인 논리를 앞세우기 위함일 뿐입니다.

개헌을 통해 권력을 지속시키겠다는 야욕에 눈이 어두운 현 정권은 구제역으로 인해 죽어가는 가축을 바라보며 숨을 거둬야 하는 농민의 죽음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야만 했던 32살의 무명작가의 죽음도 특별해 보이지 않았을 듯합니다.

'능력이 없어 죽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는 식의 논리는 더욱 더 많은 이들이 죽음에 놓일 수밖에 없음을 예고합니다. 사회적 변화가 절실한 상황에서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권력층의 모습은 경악을 넘어 저주스러울 정도입니다.

어느 한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착취만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구조적 문제로 인해 다수의 노동자들은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려 있습니다. 합리적인 사회적 시스템 정비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수많은 최고은이 양산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미 경고음을 내기 시작한 지 한참 지났습니다. 누구를 위한 사회인지 무엇을 위한 발전인지. 그 기본에 충실한 답변을 도출해 내지 못한다면 사회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노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진 자들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을 나락으로 빠트리는 현재의 사회 구조가 가시적인 모습으로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사회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무명작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옆집 문에 적어 놓았던 쪽지는 유언이 되었고 그 유언은 수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모든 가치의 척도로 삼으며 착취의 경제를 정당화하고 부도덕함이 정의라고 외치는 작금의 상황은 수많은 최고은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꿈을 담보로 노예를 만드는 사회적 시스템이 변화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에 미래는 없습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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