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꽃은 홈런입니다. 주자가 없을 때 타자가 한 번의 타격으로 득점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홈런입니다. 뒤지던 경기에서 홈런 한 방에 힘입어 분위기가 반전되어 역전에 성공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호투하던 상대 에이스를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 역시 홈런입니다. 경기 종반 동점 혹은 역전 주자가 출루한 상황에서 홈런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상대 배터리와 벤치가 느끼는 위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29년의 프로야구 역사상 1983년 삼성 이만수 이래 작년 롯데 이대호까지 절반이 넘는 16명의 MVP가 홈런왕이었음을 감안하면 홈런의 위력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2009년 페타지니를 제외하면 최근 10여 년간 LG에는 이렇다 할 홈런타자를 꼽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LG가 8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타선의 중심을 잡아줄 확실한 홈런 타자가 4번 타순에 자리 잡지 못한 것은 곧 ‘소총 부대’에 불과한 LG 타선의 취약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홈런왕 = MVP’였던 공식을 감안하면 전신 MBC 청룡 시절부터 홈런왕을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LG가 MVP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것은 당연해보입니다.

▲ 2010 프로야구 LG트윈스와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LG의 6회말 2사 2.3루 찬스에서 타석에선 박용택이 2타점 좌전안타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LG 박용택이 장타자로의 변신을 통한 붙박이 지명타자를 선언했습니다. 프로 데뷔 후 9년 동안 한 번도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적 없는 발 빠른 교타자 박용택이 장타자로의 변신에 성공한다면 홈런 타자가 귀한 LG는 물론 주장으로 유임된 박용택 개인으로서도 일석이조일 것입니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박용택의 변신 선언은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도박에 가깝습니다. 어깨 부상의 재활 실패로 인해 외야 수비에서 배제되며 설 자리가 사라진 것입니다.

박용택의 롤 모델은 롯데 홍성흔입니다. 2009 시즌 박용택과 타격왕 경쟁을 했던 홍성흔은 2010 시즌에 접어들어 장타자로의 변신을 선언한 후 홈런(12개 → 26개), 타점(64타점 → 116타점), 장타율(0.533 → 0.601)이 비약적으로 향상했습니다. 하지만 홍성흔도 시즌 초반 변화된 타격 자세에 적응하지 못해 잠시 슬럼프에 빠진 바 있습니다. 당시 로이스터 감독의 전폭적인 믿음이 없었다면 장타자 홍성흔은 탄생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박용택은 홍성흔과 다릅니다. 현재 LG의 외야진의 선수층은 8개 구단 중 가장 두텁습니다. 박용택 외에도 ‘빅5’의 이병규, 이진영, 이택근, 이대형이 있으며 지난 시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은 이병규가 있습니다. LG에는 희귀한 우타 외야수 정의윤도 상무에서 전역해 가세했습니다.

박용택이 새로운 타격 자세에 적응하지 못해 슬럼프에 빠질 경우 8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의 부담을 안고 있는 LG 박종훈 감독이 얼마나 많은 기회를 부여할지 의문입니다. 플래툰 시스템을 선호하는 박종훈 감독의 기용 방식을 감안하면 좌타자 위주의 LG 타선과 맞서는 상대 팀들이 좌완 투수를 집중적으로 투입할 때 좌타자 박용택 대신 우타자 정의윤, 박병호 등이 기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용택이 외야 수비를 포기하고 지명 타자로 나서겠다는 각오는 외야수와 지명타자 요원이 넘치는 팀 내 포지션 경쟁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박용택은 매우 예민한 심성의 선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9 시즌 0.372의 고타율로 타격왕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2010 시즌을 앞두고 시범 경기에서 몸에 맞는 공으로 인해 상실한 타격감을 되찾기까지 반 년 가까운 긴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재작년에 터득하고 작년 긴 슬럼프를 거치며 확립한 타격 자세가 박용택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포기하고 몸을 불려 타격 자세를 모두 뜯어 고친다는 것은 프로 무대에 갓 데뷔한 젊은 선수도 아닌 32세의 예민한 선수에게는 크나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떨어져 장타자에서 교타자로의 자연스런 변신을 꾀한 선수는 많아도 그 반대의 경우는 흔치 않다는 것 또한 박용택이 넘어서야 할 벽입니다. 홈런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홈런 타자가 각광받는 것입니다.

박용택의 나이와 이전까지의 커리어를 감안하면 장타자로의 변신은 선수 생명을 건 도박입니다. 팀 내에 넘치는 교타형 좌타자들과의 차별화를 위한 고육지책이 만일 실패하면 다시 체중을 줄이고 어깨를 보강해 외야 수비에 나서거나 1루수로 전업하기도 어렵습니다. 최악의 경우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 소리 소문 없이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팀과 자신을 위한 박용택의 도박에 가까운 과감한 결단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주목됩니다.


야구 평론가. 블로그 http://tomino.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MBC 청룡의 푸른 유니폼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적시타와 진루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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