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에 일본의 우승으로 끝난 2011 아시안컵은 동아시아의 선전, 서아시아의 몰락으로 정리해볼 수 있었던 대회였습니다. 한국, 일본, 호주 등 아시아 빅3의 재확인, 그리고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카타르 등 중동을 대표하는 팀들의 조기 탈락은 2000년대 후반 이후 재편된 아시아 축구 판도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해외 진출을 통해 선수들의 질을 높이며 기존의 틀을 부숴나가는 동아시아 축구, 우물 안 개구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동 축구의 '극과 극' 결과는 향후 아시아 축구의 방향, 미래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평가와 무관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태국,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이 있는 동남아시아 축구였습니다. 지난 2007년 대회를 개최한 바 있는 동남아시아는 이번 대회에서 인도만 본선에 출전했고, 이마저 한국, 호주라는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하며 힘 한번 못 쓰고 탈락하는 수모를 겪으며 또 한번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태국, 인도네시아 등이 아시아 클럽 대회에서 비교적 괜찮은 면모를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동남아시아의 끝없는 몰락은 참 안타깝기 짝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 인도네시아 축구팬들
그렇다고 이 나라들의 축구 열기가 아주 없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리버풀 등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 팬들의 열광, 충성도가 대단한 곳이 바로 동남아시아입니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는 2010-11 시즌부터 이를 반영해 일부 경기를 아시아 팬들이 많이 볼 만한 시간대에 편성하는가하면 레알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가 참가하는 LFP 인터내셔널 컵에 동남아시아에 있는 한 팀을 초청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럽 축구 시장에서 상당히 잠재력 있는 폭발력을 지닌 곳으로 동남아시아를 꼽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고, 실제로 이를 반영해 동남아시아 기업을 팀 스폰서로 활용하는 마케팅도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축구에 대한 열기, 열정만큼은 정말 대단한 동남아시아인데도 정작 국가대표팀이나 클럽팀의 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합니다.

동남아시아가 아시안컵에서 4강 이내 성적을 낸 것은 지난 1972년 태국 대회 이후 단 한 팀도 없었습니다. 당시 예선에 6개국이 출전해서 태국과 크메르 공화국(현 캄보디아)이 나란히 3,4위를 차지해 동남아시아 축구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 대회 이후 본선 조별 예선에조차 동남아시아 팀이 오르는 모습을 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사이 한국, 일본, 중국의 동아시아와 중동으로 대표되는 서아시아로 아시아 축구 판도가 완전하게 정착되면서 동남아시아 축구가 설 자리는 거의 없었습니다. 2007년 동남아시아 4개국 공동 아시안컵 개최를 통해 활성화를 모색하는가 했고, 어느 정도 가능성 있는 모습도 보였지만 네 팀 모두 결과적으로는 8강 토너먼트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클럽 축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태국의 농민 은행이 1994년과 95년 2년 연속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현 AFC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고, 2003 초대 AFC 챔피언스리그에 태국의 BEC 테로 사사나가 준우승에 오른 바 있었습니다만 그 외에는 16강 토너먼트조차 오르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지난 2010 시즌 역시 페르시푸라 자야푸라(인도네시아), 암드포스(싱가포르)가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모두 한국, 일본의 벽을 넘지 못하며 예선 탈락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남아시아 축구가 예전부터 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동남아시아 축구는 아시아에서 어느 정도 수준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버마(현 미얀마), 태국, 말레이시아 등이 탈아시아를 꿈꾸며 월드컵, 아시안게임, 아시안컵 등에서 좋은 성적을 냈고, 실제로 한국은 이들에 발목을 잡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프로 축구 창설을 계기로 아시아 각국의 자국 리그의 프로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80년대 이후 동남아시아 축구의 경쟁력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는 태국 정도를 제외하면 아예 국제 무대는 물론 아시아 무대조차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수준으로 전락하며 위기를 맞았습니다. 여기에 해외 자본이 유입돼 팬들이 자국 리그보다 프리미어리그 같은 해외 리그로 눈길을 돌리면서 더욱 경쟁력 하락이 가속화되는 계기로 이어졌습니다. 나름대로 자국리그 활성화를 위해 좋은 선수를 영입하려 시도하는 등 안간힘을 쓰기는 했지만 워낙 커질 대로 커진 해외 축구에 대한 관심을 돌려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리그, 대표팀 모두 위력적인 모습조차 보여주지 못하며 하락을 거듭했습니다.

이를 돌려보기 위해 동남아시아 나름대로 더 큰 모험을 시도해보기도 했습니다. 바로 월드컵 개최가 그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지난 2007 아시안컵 개최를 통해 가능성을 인정받았던 만큼 월드컵 개최로 자국 축구에 대한 관심도 높이고, 대표팀 수준도 높여보겠다는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2022년 월드컵 개최를 노렸던 인도네시아는 자국 정부의 인증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중도에 포기하는 신세를 맞았습니다. 카타르가 2022년 월드컵 개최권을 가져간 가운데서도 동남아시아는 아세안(ASEAN) 회원 10개국 공동 개최라는 사상 초유의 도전을 시도하는 등 앞으로도 월드컵 개최를 위해 나름대로 연구, 노력을 거듭해나갈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아시아를 비롯한 국제 축구계 여론의 뭇매를 맞을 가능성도 여전히 높아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동남아시아 축구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2007년 아시안컵에 출전한 4개 동남아시아 팀이 모두 예선 탈락하기는 했어도 희망을 보여준 사례들도 적지 않았고, 이번 아시안컵에 나선 인도 역시 바레인, 한국을 상대로 투혼의 경기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축구를 비롯해 스포츠에서는 언제나 중심에 서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수준'을 요구하는 게 사실입니다. 적어도 동남아시아 축구가 그 '어느 정도의 수준'을 키우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 한계를 이번 아시안컵에서 절감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AFC 챔피언스리그 등을 통해서 느낄 것입니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과연 동남아시아 축구가 단순하게 월드컵 같은 대회를 유치하는 것으로 끝낼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두고 볼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발전을 돕기 위한 AFC(아시아축구연맹) 차원의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시아 축구가 더 커지려면 동아시아, 서아시아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축구도 커야 하기 때문입니다. 축구 열기를 활용한 동남아시아 내 해외 축구의 영향력 확대를 마냥 달갑게 봐서는 안 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언제쯤에나 동남아시아 축구가 수준 있는 모습을 갖추며 아시아 축구의 전면에 나설지 앞으로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대학생 스포츠 블로거입니다. 블로그 http://blog.daum.net/hallo-jihan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고, 글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