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경악할 만큼 개봉작이 많습니다. 설 연휴의 극장가를 미리 선점하려는 의도인 듯한데, 다음 주에는 이렇다 할 개봉작이 없는 걸 보니 한탄이 나오네요. 적당히 분배해서 개봉하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걸리버 여행기 - 오만방자하고 재미마저 없는 미국식의 변주 ★★

<걸리버 여행기>는 조나단 스위스프트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줄거리는 생략해도 되겠죠? 원작이 1720년대에 나왔으니 강산이 바뀌다 못해 갈아엎고도 남을 세월이 흘렀지만, 소인국이란 소재는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게다가 잭 블랙까지 출연했으니 더더욱 그러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걸리버 여행기>는 이 소재를 전혀 살리지 못합니다. 러닝타임 내내 철저히 미국식 문화를 향유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어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스타워즈, 타이타닉, 아바타> 등을 패러디의 수준에서 삽입한 건 애교 수준이고, 타임 스퀘어까지 소인국에 재현한 건 오만함의 절정을 이룹니다.

미국인들조차 흥미를 느끼지 못해 박스오피스에서 참패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이 영화에서 제가 흥미로웠던 건 'TS'효과로 찍은 오프닝 크레딧이 거의 유일합니다. 소인국을 미니어처 세상으로 장식하는 '독재자' 걸리버를 보고 있는 건 전혀 재미있지 않았어요. <시즌 오브 더 위치>에 버금갈 정도로 시나리오는 성급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으며, 연출은 그마저도 살리지 못합니다. 그저 잭 블랙과 에밀리 블런트가 아까워 한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특히 고군분투하는 잭 블랙은 안쓰러울 지경... 그나마 그라도 있었으니 가뭄에 콩 나듯 웃기는 했습니다. 이상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영화 <걸리버 여행기>를 보느니 차라리 원작의 동화버전을 한번 더 읽는 게 몇 배는 더 재미있을 겁니다.


상하이 - 어쨌든 공리는 여전히 아름답더라 ★★☆

<하이 피델리티>와 함께 존 쿠삭의 출연작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도 맘에 들었던 영화가 <1408>입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그 장점을 십분 활용하는 데 성공하면서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으로 태어났습니다. 스티븐 킹의 이야기도 매력적이지만 연출의 공도 상당해서 미스터리라는 장르에다 판타지를 갖다 붙여도 망언은 아닐 정도였습니다. 특히 인물의 심리를 반영한 공포가 지배하는 방이라는 설정이 제 입맛에 딱이었죠. 근래에 중국권의 영화에 도통 관심이 없는 제가 <상하이>를 본 것도 그래서입니다. 감독이 <1408>의 미카엘 하프스트롬이거든요.(아, <상하이>는 중국권에서 제작한 영화는 아닙니다. 다만 중국권 배우가 많이 출연하고 배경도 그러해서 흥미가 없었습니다)

<상하이>는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기 몇 달 전의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폴은 첩보원으로 잠입한 친구를 만나러 상하이에 왔으나 그가 살해당했다는 비보를 접합니다. 이에 범인을 찾고자 나서면서 배후에 있던 인물을 하나둘씩 만나고, 그 과정에서 유력한 자의 아내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아차립니다. 한편 폴은 친구를 죽인 범인에게 점점 다가갈수록 예기치 못한 비밀을 밝혀내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포스터에 친절히 써 있는 진주만 공격의 전조입니다. 실제로도 공격이 있기 전에 정보를 입수했으나 묵살했다고 합니다만... <상하이>에서의 진주만 공격은 그저 거들 뿐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기대했던 만큼 실망했습니다. 영화에 보이다시피 1941년의 상하이는 미국과 일본이 서로 견제하는 와중에 중국의 반일세력까지 얽혀 긴장감이 팽팽한 미완의 전장입니다. 그것을 반영하고자 주요인물을 미, 일, 중에서 가져왔지만 이 좋은 소재의 구도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1408>의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미스터리를 살리지 못했고, 스릴러는 더군다나 아니고, 드라마로 보기에도 이야기의 힘이 미약하기만 합니다. 상하이가 동양의 파리로 불렸다는 폴의 대사만큼이나 이 영화는 그저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겉도는 선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타운 - 그래도 난 자네를 응원하겠네 ★★★

벤 에플렉은 자신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단편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도 겸했고, <곤 베이비 곤>이라는 장편영화도 이미 연출한 바 있습니다. <타운>은 그런 벤 에플렉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미국 개봉 당시에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은 영화입니다. 흥행에서도 제법 성공했고요. 그런데 국내개봉을 기다리던 와중에 씨네 21의 20자평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쩜 달라도 이리 다를까?"하는 생각이 들 만큼 혹평을 쏟아냈더군요.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습니다.

<타운>은 '찰스타운'이란 동네를 배경으로 무장강도를 일삼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도 더그와 제임스는 둘도 없는 단짝으로, 찰스타운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마치 가업처럼 강도짓을 대물림했습니다. 한번은 은행을 털다 한 여자를 인질로 잡았는데 하필 인근에 살고 있어 그들에게 골칫덩이가 됩니다. 과격한 성격의 제임스가 죽이려 하자 더그는 자신이 처리하겠다며 그녀에게 접근하고, 사랑에 빠지면서 새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고로 <타운>은, 이를테면 자신의 의지와 달리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이들의 얄궂은 운명 따위를 담으려는 의도가 담긴 듯합니다.

다만 감상자의 입장에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영화의 배경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어느 정도는 필수라는 것입니다. <디파티드>에서 묘사했듯이 찰스타운이 속한 보스톤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범죄조직으로 악명이 자자합니다. 때문에 이 영화의 찰스타운은 <콜래트럴>의 L.A.처럼 하나의 캐릭터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캐릭터들에게 공감하지 못한다면 영화의 매력은 반감이 될 수밖에 없는데... 애석하게도 <타운>이 그렇습니다.

거두절미하고 <타운>이 씨네 21로부터 혹평을 받은 이유는 명백해 보입니다. <디파티드, 히트> 등과 비교하자면 <타운>은 배경을 묘사하는 것에 상당히 인색한 편입니다. 그렇다 보니 적어도 국내 관객들로부터는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버겁습니다. 범죄조직원으로서의 운명이나 무장강도란 면에서도 두 영화를 연상시키지만 익숙한 이야기라 흥미를 돋울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간혹 등장하는 총격전마저도 <히트>와 견줄 만한 수준은 아니라 여러모로 안타깝습니다. 반면에 - 분명 이유는 있지만 - 더그의 로맨스에 대한 비중은 극의 전반을 지배할 만큼 비중이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포스터의 '리얼 범죄 액션'이란 카피에 혹해서 관람한다면 또 한번 낚시감이 되어주는 꼴입니다.

벤 에플렉의 연기도 좋았다고 말하기가 망설여집니다. 오히려 조연인 제레미 레너와 피트 포슬웨이트, 크리스 쿠퍼의 연기가 빛을 발해 주연으로서의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씨네 21의 평이 가혹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미국의 평단처럼 호평을 해주고 싶지도 않지만 말입니다. 기본에 충실하다는 면에서는 평균점을 줄 수 있다고 보며, 초반부의 지루함에 비해 중반부를 지나면서 나름의 페이스를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자극적이지 않고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도 플러스가 되긴 합니다만...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기에는 여전히 꺼려집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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