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1930년대 구인회에서 활동하던 작가 이상과 구보 박태원, 이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가 김재희는 이들을 100년 전 경성을 활보하는 셜록과 왓슨으로 설정, <경성 탐정>이라는 추리 소설 시리즈로 소환했다. 이상과 박태원이 활보하던 경성, 재즈 음악이 흐르는 다방이 있고, 영화관이 성황을 이루었으며 양복점, 양장점이 자리하고, 인력거와 전차가 오가는 경성 거리에 빠질 수 없는 당대 인기 메뉴가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누비는 배달꾼들의 냉면과 설렁탕, 이 차고 뜨거운 음식은 당시 경성의 음식 문화를 상징하는 두 가지 대표 음식으로 당시를 재현한 소설 속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제 시대라는 역사적 규정 속에 우리는 그 시절 살아갔던 사람들의 생활상에 대해 정작 제대로 알지도, 알 수 있는 기회도 없다. MBC 스페셜은 개그맨 이승윤과 김지민을 등장시켜 2부작 경성 음식 야사를 준비했다. 100년 전 경성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저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들 속에 결결이 스며든 '식민지의 역사', 음식을 통해 살펴본 그 시절 살아가는 이야기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국수 중에서

경성 거리의 냉면 배달

MBC 스페셜 ‘경성 음식 야사 2부’ 편

시작은 냉면이다. 요즘 젊은이들도 새삼 그 맛에 반해 냉면 순례를 한다는 음식, 동양 삼국 중에 유일하게 찬 국수를 즐겨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 냉면이 없던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 중국 냉면까지 만들어 냈다는 유래에서 보이듯 냉면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먹던 음식이다. 추운 겨울 얼음이 서걱서걱 씹히는 동치미 국물을 끼얹어 먹던 냉면이 경성의 인기 음식이 된 건 새삼스럽지 않다. 1920년대 근대적 제빙 공장이 들어서면서 얼음의 공급이 자유로워지며 냉면의 인기를 더해갔다.

그런데 당시에는 인기를 넘어 주요 인기 배달 음식이었다는데, 자전거에 육수 주전자를 달고 한 손으로 냉면 그릇을 얹은 판을 짊어진 냉면 배달꾼이 경성 곳곳을 누볐다니. 심지어 한 번에 얼마나 배달을 할 수 있나 내기를 하다 보니 80그릇까지 배달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당시만 해도 위생 상태가 엉망이었던 식당의 환경으로 인해 식중독으로 인한 사망 사건까지 빈번하게 발생했음에도 냉면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런 냉면의 인기를 더한 건 화학조미료 아지노모도였다. 맛없는 냉면도 맛있게 만들어 버리는 이 아지노모도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엄청난 광고의 물량만큼 비쌌던 조미료를 쓰지 말자는 식당들의 결의는 무색해지기가 십상이었다. 새로운 맛, 결국 일본에 의해 우리의 입맛을 현혹시킨 이 근대적인 맛은 일본화된 입맛의 첨병이 되었다.

설렁탕이 원래 소머리국밥?

그렇게 차가운 냉면의 인기에 물러서지 않는 메뉴가 있었으니, 바로 설렁탕, 요즘이야 설렁탕 하면 소고기 사태 등을 끓여서 만든 음식이라 생각하지만 당시 설렁탕은 설렁탕집 앞에 끓이고 남은 소뼈가 즐비하듯 소머리뼈에 각종 부산물로 끓인 탕국이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소머리국밥이라고 먹는 메뉴가 당시엔 설렁탕이었다고 한다.

왜 설렁탕이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거기엔 식민서사의 속내가 숨겨져 있다. 1930년대 전쟁에 나선 일본은 일본군의 식량 조달을 위해 소를 도축하여 통조림을 만들었고, 이런 일본군 식량에 쓰이고 남은 부산물들인 뼈, 피, 다리, 머리 등이 시장으로 나와 설렁탕 등의 주메뉴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20년대 100곳이 넘는 설렁탕집, 매일 아침 땔감 팔기 위해 경성을 찾은 나무장수들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즐겨 찾던 핫플레이스, 소의 부산물로 만들어 혐오 음식이란 편견 덕분에 처음에는 양반 등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꺼렸지만 달달한 깍두기를 더한 설렁탕의 짙은 풍미는 결국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경성 사람 모두가 사랑하는 대표적 음식으로 설렁탕을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인력거꾼 김첨지가 '운수 좋은' 덕분에 사들고 들어간 음식도 설렁탕이었둣 그 시절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다. 마치 미군 부대 앞에 미군이 소용하고 남은 각종 햄 등을 넣은 부대찌개집이 융성한 듯, 설렁탕에도 식민의 흔적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서 먹어 선술집?

MBC 스페셜 ‘경성 음식 야사 2부’ 편

설렁탕 못지않은 핫플레이스가 바로 선술집이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즐겨 찾던 곳, 비록 서서 먹어야 했지만 단돈 5전에 술 한 잔과 안주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던 곳 바로, 선술집이다. 비지전골, 갈빗국, 심지어 너비아니 구이까지 저마다 개성을 지녔던 경성의 선술집이야말로 가벼운 호주머니로 귀가하는 식민지민의 저녁을 달래주는 최고의 위로였다.

그런데 이 선술집에서 파는 술은 막걸리였다. 왜 막걸리만 팔았을까. 선술집의 이야기는 일제 시대 일본에 의해 우리 술이 사라져간 역사로 넘어간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집마다 술을 담가먹던 '가양주'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는 박목월의 시야말로 우리네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런 가양주 전통의 우리나라에 술 면허 제도를 실시한다. 술에 앞서 술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누룩 제조 허가제를 실시하여 술 제조를 통제하기 시작하고. 1920년 후반부터는 밀주 단속을 강력하게 실시하기 시작한다. 국세의 30~40%를 주세로부터 얻어내던 당시 밀주는 곧 세금이 새는 것이 되었고, 당시 월급 30~40원이던 시절 벌금 20원을 매기며 밀주 단속을 실시했다고 한다.

덕분에 집집마다 담그던 우리 고유의 다양한 술이 사라져갔다. 거기에 더해 원래 청주와 청주에 약재를 더한 약주로 나뉘던 우리의 청주를 '약주'로 통칭하고 일본 청주를 청주라 부르도록 하며 일본 청주를 대중화시키도록 유도하여 우리 고유의 맑은 술 시장을 왜곡 축소시켰다. 또한 1930년대 전쟁이 격화되며 부족해진 쌀은 더더욱 고유의 술 시장을 위축시키며 막걸리 등 획일화된 술 문화 정착을 부추기게 되었다.

쌀이 만병의 원인?
전쟁은 술만이 아니라 식문화 자체를 변형시켰다. 1930년대 총독부는 쌀을 아끼기 위해 하루 두 끼 먹을 것을 종용하고 그것도 모자라 점심을 감자 정어리로 먹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심지어 호텔에서도 보리밥, 고구마 밥을 제공했다.

하지만 워낙 쌀밥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던 우리나라 사람들, 그런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일본은 만병의 원인이 쌀밥이라는 쌀밥 유해설을 유포했다. 하지만 쌀이 배급되고 배급되는 쌀에 보리가 반이나 섞여 나누어 주는 상황에서도 쌀을 밀거래하는 등 사람들의 쌀 사랑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쌀이 부족한 상황에 뜻밖에 호황을 누리게 된 건 '호떡'집이었다. 밀가루를 둥글넙적하게 반죽하여 그 안에 설탕이나 팥을 넣어 구워낸 호떡이 경성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중국에서 온 떡이라는 의미의 호떡,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중국인들이 많아지면서 '쿨리'라 불리던 중국 노동자들이 간편하게 한 끼를 때우기 위해 만들어졌던 호떡이 인기 메뉴가 되며 서울에만 150여 곳의 호떡집이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호떡집의 성황은 '지나', '때놈', '짱꼴라'라고 낮잡아 불렸던 중국인들과의 갈등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중국 길림성 만보산 지역 개간지에서 발생한 중국 농민과 우리 이주민 사이에서 벌어진 만보산 사건은 조선인 살상이라는 거짓 뉴스로 인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적 정서에 불을 붙였고 전국에서 무차별적인 중국인 린치로 인해 120명의 중국인이 죽는 사건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인기 있었던 '호떡'집은 그런 당시의 민족적 감정과 함께 우리 돈을 손쉽게 긁어가는 중국인이라는 우리의 편견과 그런 우리나라 사람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며 외상을 줄 수 없다는 중국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곳곳에서 마찰을 빚으며 난투극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냉면, 설렁탕, 호떡 등 오늘날 우리가 즐겨먹는 음식들을 100년 전 경성 사람들도 즐겨 먹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은 집에 빙수기를 놓고 하루에 7~8그릇의 빙수를 드셨다고 하니 요즘으로서도 '빙수 마니아'의 경지를 넘어선다. 그런가 하면, 위생 관리가 제대로 안 돼서 식중독의 원인이 된 빙수를 먹지 말라는 총독부의 포스터에 그려진 빙수만 보고 입맛을 다셨던 문맹률 70%의 현실은 우리가 몰랐던 또 그 시절의 또 다른 이면이다. 같은 음식이지만,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음식 그 이상의 식민서사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그 시절 음식을 통해 식민지 역사의 한 장을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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