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방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2.9%에 달하며 세계 12위를 차지한다. 올해 국방예산은 지난해보다 6.2% 늘어난 31조 4천31억원이다.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 국방비로 쓰이는 가운데, 난데없이 KBS가 국군 장병들을 위한 '발열조끼' 성금을 모금하고 나섰다.

복수의 KBS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인규 KBS 사장이 지난해 연말 예산안 날치기 때 발열조끼 예산이 통과되지 못했으니 KBS가 이를 마련해주자는 좋은(?) 취지에서 직접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KBS 사장은 정부 산하 기관장으로서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박재완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현 고용노동부 장관)의 발언을 몸소 실천하고 있으니, 괜히 '특보사장'이라고 하는 게 아닐지어다.

▲ 21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KBS 1TV에서 방송된 발열조끼 성금모금 방송
당초 20억원을 목표로 했으나 현저히 미달한 약 2억원만이 모금되자 KBS는 21일 오전 2차 특별생방송을 돌입했는데, 방송 내용 또한 사뭇 비장하다.

발열조끼 생산공장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철통경계'를 서고 있는 최전방 부대를 방문해 "북한 도발에 강력 응징"이라는 레퍼토리를 반복적으로 방송한다. 국가안보에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마련인 '전국민 결집'도 당연히 강조됐다. 한 한나라당 관계자는 성금을 기탁하며 "(국민들이) 안보불감증에 빠져있다"며 불순한(?) 개인들을 탓하고, 직접 발열조끼를 걸친 개그맨들은 'KBS가 대단히 큰 일을 했다' '1월 21일을 발열조끼의 날로 정하자'고 호들갑을 떤다.

발열조끼만으로는 국군장병들을 위무하기 부족하다 판단했는지 '발열양말'까지 등장했으며, 국군음악대로 보이는 이들이 성금기탁자들을 향해 풍악(?)을 울려댄다. 이날 방송에 대해 박영선 언론연대 대외협력국장은 자신의 트위터(@happymedia)에서 "여름되면 아이스조끼도 모금해라"고 꼬집었다.

2시간여의 난리법석이 끝날 즈음, MC가 모금액수를 발표했다. ARS 모금, 성금기탁 등을 종합해 23억7천2백만원 정도가 모였단다.(14일부터 21일 현재까지) 언론사의 본분을 저버리고 열심히 뛴 탓인지 꽤 많이 모였다. 목표액 초과 달성에 김인규 사장은 이제서야 흡족한 웃음을 짓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금액에는 삼성, 현대차, 대한항공, 신한은행, 롯데그룹, 두산그룹 등 대기업들의 억대 성금이 줄줄이 포함돼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국가안보'를 위해 대동단결하자는 뉘앙스를 끊임없이 전달하고 있는 이 방송, 하도 우스꽝스러워 보는 내내 웃었지만 마음은 한없이 불편했다.

국가세금으로 지급돼야 할 발열조끼를 왜 국민들이 성금 모아서 사줘야 할까?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가 '성금' 기부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그 많은 국방예산으로 군인들 발열조끼 하나 사줄 수 없단 말인가? 그런 상황이라고 해도 그걸 왜 공영방송사가 저렇게 난리법석을 떨며 나서는가? 그 의도는 과연 순수한 것일까?

발열조끼 성금 모금과 관련해 KBS 사측을 취재하면서 놀란 부분은, "왜 이런 좋은 일에까지 시비를 거느냐"는 사측의 반응이었다. '최전방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을 위해 발열조끼 성금모금하는 게 뭐가 나쁜 일이냐'는 모습에서 개인으로서의 합리적 의심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1차 발열조끼 성금모금 방송 이후 한 시청자는 KBS 시청자 게시판에서 "국방부 예산은 도대체 어디에 사용하고, 국민들 돈으로 성금을 모금하는 것인가"라고 물으며 "타당한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시청자의 말마따나 KBS가 발열조끼와 관련해서 해야 할 것은 '모금 특별 생방송'이 아니라 '보도'를 통해 예산 삭감의 원인과 책임을 따져묻는 것일 테다.

사회의 중심축 역할을 해야 할 공영방송이 정권의 선전도구로 완벽하게 전락한 지금의 모습은, 비극이고 또 비극이다. 모금방송에서 한 개그맨은 발열조끼 모금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1월 21일을 발열조끼의 날로 정하자'고 했겠지만, 1월 21일은 '다른 의미'에서 KBS 역사에 분명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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