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평생을 목수로 성실하게 살아온 다니엘. 하지만 나이가 들어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지만, 직원들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신청하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 감독은 영국 사회 복지제도의 문제점을 다니엘이라는 늙은 목수를 통해 폭로하고자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복지제도에 앞서, 평생을 훌륭한 목수로 친절한 이웃으로 살아왔던 한 노인이 ‘디지털’ 문명 앞에서 절망하고, 폭도로 몰리며, 결국 생을 마감하고야 마는 모습에서 변화하는 시대에 무너지는 한 세대의 좌절을 절감하게 된다.

영화는 극적이었지만 우리는 현실에서 너무도 많은 다니엘들을 조우하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신상 스마트폰 앞에서 우물쭈물과 깜놀을 오가는 우리 부모님들은 어쩌면 '완화된', 다니엘의 분신들이 아닐까. 8월 1일 방영된 EBS 1TV <다큐 시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는 종이통장, 매표소, 영수증 등이 멸종되어 가는 이 시대, 디지털 소외 계층이 되어가는 노인 세대의 문제를 다룬다.

노인이 된 나와 마주하게 만드는 디지털

EBS 1TV <다큐 시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편

77세 이분남 할머니는 얼마 전 황혼 육아를 졸업하고 동작구 어르신 노래교실 회장님으로 자유를 만끽한다. 그런데 이런 이분남 할머니를 좌절케 하는 것이 있다. 그 세대 어르신들이 그러하듯 종이통장을 몇 개씩 애지중지 '키워'가시는 중, 단 돈 만원이라도 직접 가서 입금하는 습관대로 금융기관을 찾았다. 그런데 아차, 오늘따라 그만 도장을 잊고 오셨단다. 77년의 내공 어린 말빨로 은행원을 달래보았지만 정해진 입금 매뉴얼 앞에 요지부동, 결국 터덜터덜 은행 문을 나서던 이분남 할머니는 처음으로 자동입출금기를 사용하게 된다.

친절한 기계음에 따라 몇 번을 클릭, 무사히 입금을 마친 할머니는 의기양양, 그 기세를 몰아 이번에는 자동주문기기 햄버거 셀프오더에 도전하다. 그러나 순조로웠던 은행과 달리 비슷비슷한 메뉴, 조금만 잘못 눌러도 다시 처음으로 가는 주문시스템 앞에 갈 곳 잃은 손, 방황하던 눈동자는 결국 '안 먹고 말지', 사람이 주문받는 칡냉면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신다. 그럴 때마다 ‘노인’이 된 나와 마주하게 된다는 이분남 할머니.

홀로 사는 할머니의 낙은 홈쇼핑이다. 그런데 늘 상담원과 통화를 통해 물건을 사신다는 할머니, 2만 원이나 싸다지만 앱은 할머니에겐 ‘먼 그대’이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손주들의 동영상을 보여주는 고마운 기기지만, 눈 밝고 물어볼 수 있다는 할머니에게 길찾기 앱은 딴 세상 이야기다.

할머니가 서른두 살 되던 해 전화기가 등장했다. 전화교환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에 차량용 휴대전화기가 등장하기 시작해서 가속도로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 초고속 5G시대에 이르렀다. 4차 산업혁명으로 디지털은 초고속 발전을 거듭하고, 그 과정에서 기술을 습득한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는 나날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는 2,30대도 따라가기 힘들다는 디지털 혁명. 영화관, 마트의 무인시스템은 나날이 늘어나 그 규모가 2500억에 달하며, 이는 무려 10년 전에 4배에 이른다. 편리함은 극대화되어가지만 그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벽'이 되고 있다. 연령별 디지털 정보화 수준이 전체 국민을 100으로 놓고 봤을 때 20대가 126.5, 50대가 92.8이다가 60대가 되면 69.6%, 70대로 되면 더 떨어져서 42.4%가 된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하지만 노인들에겐?

EBS 1TV <다큐 시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편

박일준 디지털리터러시교육협의회 대표가 말하는 디지털시대는 이러하다. 지식은 공짜이고 물어보면 다 얻을 수 있는 있게 되었지만, 그래서 그런 지식을 얻을 수 없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는 사회적 권력의 격차가 되어,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게 되며, 이는 디지털 문명이 발전할수록 더 심해질 것이라고 한다.

지자체 중 인구대비 노인 인구가 가장 많다는 부산. 증산 경로당 19명의 노인 중 스마트폰을 쓰고 계신 분은 4명에 불과했다. 왜 편리한 스마트폰을 안 쓰냐는 질문에 노인들은 너무 복잡하다고 한다. 글씨가 너무 작단다. 크게 하는 기능이 있다니 그런 건 모르겠다고 하신다. 모바일 티켓이 일상화되었지만, 자식들이 모바일 티켓을 보내드릴 수 없는 형편. 자식들이 예매한 기차표 좌석을 일일이 손으로 적어서 기차를 타신단다. 은행도 점점 가기 힘들고 이제 다시 돈도 장판에 깔아야 한다던 경로당 노인들은 앞으로는 점점 기계로만 하는 세상이 될 거라는 제작진의 말에 '그때 되면 우린 다 죽겠지' 하는데 웃음의 끝이 씁쓸하다.

그러다 보니 노인들은 당신들이 편한 곳을 찾게 된다. 극장에 가도 인기작은 예매로 매진이 되거나 시간대를 맞추기 힘든 상황에 노인들은 60대만 해도 젊은 축에 속한다는 실버 영화관을 찾게 된다. 2000원의 저렴한 티켓값. 어르신 우대에 인기 간식메뉴가 빈대떡에 건빵인 이곳에 하루 평균 천여 명 노인들이 몰린다.

EBS 1TV <다큐 시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편

하지만 노인들만 우대하는 곳이 어디나 있는 건 아니다. 기차역에 가서 직접 표를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좌석 우대권은 온라인 예매자에게 우선적으로 제공되니, 주말의 경우 4,5시간을 기다려도 가고자 하는 차편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러다 보니 정작 젊은이들은 예매로 앉아서 가고 어르신들은 입석으로 서서 가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진다.

이런 상황에 대해 베이비붐 세대가 노인이 되는 시기가 되면 디지털 시스템에 한결 접근이 나아질 것이라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 이전의 노인 세대는 '이등국민'처럼 죽을 때까지 소외된 상황에 내쳐지게 된다.

국가적으로 비용절감 차원에서 디지털 시스템화는 시대적 조류가 되어가고 있는데, 그런 흐름에서 소외되는 장애인, 노인을 위한 노인 할당 서비스, 혹은 오프라인 상에서 아날로그적인 인간적인 도우미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소외는 현실에서 세대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700만 노인 시대, 좁아지는 시야, 줄어든 근력, 떨어지는 인지 능력 등은 노화의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디지털 사회는 그런 노화를 승인하지 않는다. 또한 젊은 세대는 가르쳐줘도 따라 하지 못하는 노인들에 대해 무지하다 폄하하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노인들은 스스로를 '짐'이라 여기게 되는 것.

EBS 1TV <다큐 시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편

다큐는 그런 상황에 대해 ‘노력’의 여지를 살핀다. 일주일에 3일 6시간씩 낙동강 녹조 상태 조사원으로 일하는 65세 서두남 씨는, 더 나이 들기 전에 배우자는 언니의 권유에 10년 전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이래로 서두남 씨는 각종 자격증을 땄고, 드론 자격증까지 따서 드론과 함께 나이를 저 멀리 띄워 훨훨 날고 계시단다. 처음엔 입력, 검색이란 단어조차 생소했다는 서두남 씨는 이젠 노인들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가르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서두남 씨와 같은 경지에 이르는 건 쉽지 않다. 실제 디지털은 사회적 약자들이 보다 쉽게 정보와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시스템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서두남 씨처럼 나이와 무관하게 주변부에서 지식과 정보의 중심에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기기들이 스마트하게 연결돼있는 ‘스마트홈’ 실험에 참가한 평균 74세 노인들에게 터치 하나로 조작되는 스마트홈은 불러도 대답 없는 장벽이다.

긴 세월 살아온 방식이 고착된 노인 세대에게 새로운 것은 그 자체로 두려움이다. 처음 마주했을 때 성공한 체험이 그 두려움의 벽을 낮출 수 있는 디딤돌이 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노인들에게 디딤돌이 될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다큐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고 했지만, 정작 현실은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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