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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KBS에서 “법은 평등한가?”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였다. 취재 중 만난 한 판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판결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90%가 판결 내용에 불만족해요. 50%는 소송에서 져서 그런 것이고, 40%는 자신의 바람보다 덜 이겨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만족한 10%만이 정의를 찾은 건가요? 판결 참 어렵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당시 법원과 검찰을 비판하는 프로그램을 기획취재하고 있던 필자에게 그 판사가 실제 해 주고 싶었던 말의 속 뜻은 이런 것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법도 모르는 사람이 우리를 비판하려고 프로그램을 기획해? 우리도 판결하려면 이렇게 힘든데…제발 판단하려고 하지마시오. 기자는 받아쓰는 것이 본업이고 그것이 공정한 보도 아니겠소?”

같은 해였다. 또 다른 프로그램을 위해 한 유명 정치인을 사전 취재차 만났다. 이런 저런 말을 나누다, 직설적인 그 정치인이 한국 언론에 대한 평소 자신의 불만을 뚝 내뱉고 말았다.

“나는 한국 언론이 판단을 안 하려고 할 때가 제일 답답해요. 아니, 뻔히 잘 못한 놈과 잘 한 사람이 명확히 구분되는데 왜 그걸 가려서 보도하지 않는건지…”

정반대다. 사람마다 언론에게 원하는 것은 이렇게 각기 다르다. 판사는 지키려는 관점이고, 정치인은 공격하려는 관점이다. 그 판사에게는 현상 유지가 좋은 것이고 그 정치인에게는 바꾸는 것이 선이다. 사람들은 지키는 것을 보수, 바꾸는 것을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나쁜 것인지 명확히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니 논점을 바꿔보자. 무엇을 위한 보수이고, 무엇을 위한 진보인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지켜야 하고, 무엇을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내 생각은 단순하다. 지키는 것이 나와 내 가족, 우리 사회를 위해 좋다면 지켜야 하고, 나쁘다면 바꿔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좋은 지, 무엇이 나쁜 것인지만 구별하면 된다. 이명박 정부의 언론 프레임대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실용은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좋으면 지키고, 나쁘면 바꾸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쉽지 않다. 문제는 좋은 것, 나쁜 것이 뭐냐는 것이다. 나와 내 가족에게는 좋지만 우리 사회에는 나쁜 것이 있을 수 있다. 반대로 우리 사회에는 좋지만 나와 내 가족에게는 나쁜 것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는 모두를 위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들만의 잇속인 것이 있고, 속에 든 명분과 겉으로 주장하는 공익이 비교적 합치되는 사안도 있다. 모두가 합의하는 완벽히 좋은 것, 모두가 반대하는 완벽히 나쁜 것은 존재하기 힘들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문제는 최선의 근사치를 찾는 것으로 정의된다. 찾아가는 과정이 민주주의이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의미 있는”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이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사람들이 “진짜” 좋은 것, “진짜” 나쁜 것에 대한 정보를 명확히 전달 받고, 그것이 자신의 일상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확실히 깨달은 다음, 민주적 의사 결정을 통해 나랏일을 정할 수 있다면, 이명박 정부와 한국의 시민사회가 죽고 살기로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대중이 현명한 상황이라면 이명박 정부 자체가 탄생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결국 언론이 사람들에게 “진짜” 좋은 것, 나쁜 것을 “제대로” 알려줘야 민주주의는 “올바로” 작동한다는 이야기이다.

여론 조사, 또는 국민 투표의 함정도 여기에 있다. 만약 언론이 사람들에게 좋거나 나쁜 것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의식에 오랫동안 층층이 쌓여서 그 사회에서는 좋거나 나쁜 것이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결정된 여론 조사, 국민투표의 결과가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는가? 4대강 사업의 이익은 정부와 나팔수 언론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고, 그 해악을 방송한다고 하면 결방시키고, 연기시키고, 끝내는 젊은 프로듀서를 징계한다는 나라에서 국민들이 4대강 사업에 대한 온전한 정보를 골고루 취득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정부 입맛에 맞는 소리는 크고 요란하게 들리고, 대통령 듣기 싫은 소리는 변방에서만 울려 퍼질 때, 국민은 의미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올바른 의사 결정을 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의 여론조사나 국민투표는 되레 기존의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 고민은 여론조사의 기본적인 전제와 맥을 같이 한다. 자유 시장 경제의 불합리한 가정처럼 여론 조사에도 사실 다음과 같은 비현실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여론 조사의 응답자들은 이미 사안에 관해 제대로 알고 있다. 응답자들은 이 사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알고 있다. 응답자들은 여론 조사에 솔직히 대답할 것이다. ”

그러나 우리가 한-미 FTA, 4대강 사업, 천암함 사건, 학생들에 대한 무상 급식, KBS의 공영성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제대로 된 정보를 바탕으로 항상 “합리적” 의사 결정을 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여론 조사원의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항상 “솔직히” 대답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오류 투성이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살 빼야겠다고 마음 먹고 백화점에 등산복 사러 갔다가 화장품을 사 오는 것이 인간이고, 전세집 구하다가 불안한 마음에 덜컥 큰 빚을 내 집을 사는 것이 사람이다. 투표장 갈 때의 마음과 찍을 때의 마음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유권자다. 게다가 무상 급식하면 왠지 빨갱이 나라가 될 것 같고, 부자 감세해야 경제가 확 살아난다고 부지불식간에 믿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이 과연 자신의 이익에 정확히 맞춰 여론 조사에 응하고 투표장에서 투표를 할 수 있을까?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자신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마음 속에 새겨 놓고 즉시 예, 아니오를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사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크게 두 그룹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는 잘 배우고 지킬 것 많은 기득권이다. 이들은 정확히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이것이 국가 정책에 어떻게 반영돼야 하는 지, 나머지 국민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업주, 대부분의 관료와 대학 교수, 돈 버는 감이 뛰어난 임대업자 등이 이에 속한다.

또 다른 한 부류는 지금 당장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유,무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현재 심대하게 자신의 권익이 침탈당하고 있기에 이를 시급히 고치지 않으면 살 길이 막막해지는 사람들은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절실함이 세상에 알려지길 원한다. 세상 사람들이 공감하길 원한다. 그들과 세상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언론이다.

▲ 12일 발행된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노보 1면 캡처.
그래서 이렇게 대조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일게다. 언론재단의 여론 조사에서 일반 시청자들은 여전히 KBS를 가장 신뢰하고, 또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라고 믿고 있는 반면, KBS의 기자와 PD 들의 94%는 KBS의 공정성이 약화됐다고 평가했단다. 설문 조사에 참여한 KBS 언론인 가운데 무려 60.9%가 회사 간부로부터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반하는 제작 자율성 침해를 경험했다고 답변했다. 유례 없는 수치다. 세계 토픽 감이다.

설문에 응한 언론인들이 675명, 그 가운데 60.9%가 자신의 양심에 반해 무언가를 억지로 만들어서 전달했는데도 시청자는 여전히 KBS를 가장 신뢰한다니…이 역설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나는 이 모순이 지금 당장 직접 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저 바깥에서 대충 들여다 보는 사람들의 차이에서 연유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자유와 인권을 억압당한 경험이 너무나 생생하고 뚜렷해서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픈 사람과, 1박 2일을 아무런 생각 없이 보며 깔깔거리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의 차이이다. 자신의 일이 되어 절박해진 사람과 아직은 자신의 일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다름이다. 절실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낳은 이 부조화는 기실 우리 언론 전체의 아이러니다.

돌이켜보라. 이 모순 역시 우리 언론인들 스스로가 만든 측면이 강하다. 만약 우리 언론인들이 진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제대로” 우리 뉴스의 소비자들에게 전달해 왔다면,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너무나 뚜렷한 상황에서 선한 것을 좋다고 말하고, 악한 것을 나쁘다고 보도했다면, 이런 대중이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아니, 이명박 정부가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출범할 수 있었겠는가? 아니, 이 정부가 3년 동안 이렇게 안하무인의 태도로 언론과 시민의 자유를 짓밟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 언론은 스스로 자신의 발등을 찍어왔던 것이다. 자유, 평등, 민주의 가치를 시민들에게 각인시키지 못한 책임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기에 앞서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왜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왜 그나마의 자유라도 있었을 때 지키지 못했을까? 왜 판단을 할 수 있을 때 판단하기를 주저했을까? 왜 보여줘야 할 것을 빠트렸을까? 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의식적인 배임이었던가, 아니면 우리의 일상에 밴 무의식적 자기 검열이었던가?

언론인이 바뀌지 않으면 언론은 변하지 않는다. 언론이 변하지 않으면 대중이 스스로를 바꾸어 가기는 지난하다. 언론은 대중이 그들의 땀과 피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바꾼 뒤에야, 비로소 바뀌었다. 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에 직면한 미국의 주류 언론도 뒷북이었고, 87년 민주 항쟁에 등 떠밀린 한국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이른바 ‘주류 언론’의 힘으로 쟁취되고 확장된 적이 과연 있기나 했던가?

그래서 희망은 다시 “깨어 있는 시민”일 수 밖에 없다.

KBS 스포츠 중계팀에서 근무하다가 2009년 회사를 휴직한 뒤 미국 미주리 대학 저널리즘 스쿨에서 유학 중인 기자. “9시의 거짓말”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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