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에 합격할 정도의 실력이라는 AI가 있다. 이 AI와 우리의 고등학생들에게 같은 유형의 국어 문제를 풀도록 했다.

‘알렉스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쓰이는 애칭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라라는 여성의 애칭은 다음 중 어느 것일까?'

남자, 여자, 알렉산드라, 알렉스 등 예시의 4문항 중 정답은 알렉스이다. 여러분들은 정답을 맞히셨는가? AI는 이 문제를 비롯하여 9문제를 풀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등학생들은 어땠을까? 이런 유형의 문제를 푼 학생들의 30%가 정답을 비껴갔다. 무엇을 물어보는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학생들, 애칭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는 학생들. 선생님은 요즘 학생들이 교과서의 글을 읽고 요약하라고 하면 그런 요약은 인터넷에 치면 다 나온다며 하려 들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한다. 인터넷에 치면 다 나와서일까? 중심 내용을 정리할 수 있는 학생들을 쉽게 찾을 수 없단다.

독서 하면 뒤처져요

SBS 스페셜 ‘난독시대 - 책 한 번 읽어볼까’ 편

실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만 되어도 당당하게 밝힌다. 자신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심지어 도서관에 와서 수다를 떨면서도 책을 왜 읽느냐며 해맑게 반문한다. 유치원도 아직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유아들을 상대로 한 독서 수상 광경, 엄마 품에 잠든 아기에게 500권의 독서상장이 주어진다. 아마도 지금 책을 안 읽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들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시절에는 책과 친근했을 것이다. 집안의 서가에는 엄마가 사 모은 각종 전집류가 쌓여 있었을 것이며 빈번하게 도서관에 엄마 손을 잡고 다녔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러던 아이들이 왜?

우리나라 국민들의 독서 관심도는 어린 시절을 넘어서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른이 되면 더한다.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읽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모들은 아이들의 독서 교육에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중학교만 가도 그 독서 교육의 ’관점‘이 달라진다. 그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교과와 연결되어 가시적 효과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다 입시 경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 강남 국어학원에 줄을 선 학부모의 말처럼 독서를 하면 ’뒤처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수학 영어 문제 한 문제라도 더 풀어야지, 어디 책 읽을 시간이 있냐는 것이다.

입시 교육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자발성이 없고 반강제적으로 책 읽기를 시작했던 우리나라의 독서 교육이 문제다. 기생충 박사로 유명한 서민 박사, 그는 우리의 교육 환경에서 책을 읽지 않고도 대학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박사의 진단에 따르면 초등학교 시절 독서조차 숙제로 만드는 우리의 교육 환경이 아이들로 하여금 책에 학을 떼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 시절 많이 읽어라 해서 질려버렸다는 것이다.

청소년의 경우, 국가 간 학력비교평가(PISA) 2006년 읽기 영역에서 1등을 했던 한국. 하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급격하게 순위가 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체 순위가 아니다. 하위권 학생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의 32.9%가 하위권에 속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교과서를 읽고 이해하기 힘든 비율이 전체의 1/3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 2019년 수능 국어 파동 같은 불수능 논란이 벌어진다. 당시 너무 어려워 문제가 된 국어 문제. 일반적으로 수능 1등급 커트라인이 90점을 상회하는데, 2018년에는 84점으로 문제가 됐었다. 출제기관에서 이 정도는 충분히 풀 수 있으리라 냈던 문제, 하지만 우리 고등학생들의 독해력은 이런 문제 앞에 '멘붕'이 되고 만다. 그러다 보니 이제 수학, 영어 외에 국어도 중요하다며 학부모들은 강남의 유명 입시학원에 밤을 새워 줄을 선다. 훌륭한 국어 강의를 들으면 해결이 될까?

그 유명한 국어 강사의 강의 시간, 한참 한국단편에 대해 설명하는 중 한 학생이 진지하게 질문을 했단다. '그런데 선생님, 역마살은 어떤 부위예요?' 수능 국어는 어휘력, 이해력, 사고력, 독해력이 필요한데 어린 시절부터 부모들이 일일이 떠먹여 준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결과물은 이제 국어학원마저 줄을 서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디지털 시대의 난독증

SBS 스페셜 ‘난독시대 - 책 한 번 읽어볼까’ 편

어른이 되면? 가끔 읽기는 읽는데 승진 등에 도움이 되는 목적형 독서를 하게 된다. 한국 성인 중 1/4이 일 년에 한 권도 책을 읽지 않는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과학적인 한글 덕분에 문자 해독률은 높지만 문맥을 이해하는 능력(문해력)은 OECD 평균 이하이며, 그중 22.4%는 초등학생 수준 이하이다.

대학생 이수민 씨는 이와 관련된 고민이 있다. 책은 당연히 읽기가 힘들고, 기사문도 길어지면 이해가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세 줄 이상 넘어가면 읽지 않는 습관이 들어 버렸다. 당연히 쓰는 것도 힘들다. 간단한 글도 쓰다 보면 걸리고, 하다못해 자소서 등의 문항을 쓰다가도 #버튼에 의존하게 된다고 한다.

이수민 씨는 자신들이 책을 읽다가 안 읽은 세대라 규정한다.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때부터 책을 안 읽은 세대, 더 이상 책을 읽으란 잔소리를 듣지 않은 시절부터 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세대, 대신 스마트폰을 손에 쥔 세대이다.

한때 독서광이었다먼 김귀희 씨는 이제 아이 둘의 엄마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으려 해보지만 좀처럼 책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시선이 머무르는 시점이나 시간을 통해 읽는 방식을 검사하는 아이 트래킹에 참여했다.

그 결과 한때 책을 즐겨 읽었다던 김귀희 씨는 어느덧 스마트폰을 보듯이 시선을 세로로 하여 스냅샷을 찍듯이 책을 읽고 있었다. 문장을 따라 꼼꼼하게 보지 않고 Z자형, F자형으로 건너뛰며 전형적인 디지털 읽기 방식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책의 내용을 깊게 이해할 수 없고 당연히 책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또한 독서는 인간의 진화적 특성에 어긋난다. 인간종으로의 진화는 20만 년 전, 하지만 문자의 발명은 6천 년 경. 늘 주변을 살펴야 하는 산만한 DNA를 가진 인간들에게 책 읽기 자체는 쉽지 않은 미션이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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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간이 진화적 특성을 이겨내면서까지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미 UCLA 난독연구센터 매리언 울프 박사. 하루 5~10만 단어를 처리하는 디지털 시대, 하지만 그 디지털의 방식은 '깊은 독서'를 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한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 씨는 우리 삶에 도움을 줄 만한 한 영혼이 우리에게 들려주고픈 말을 정리해놓은 것이라 ‘책’을 정의한다. 읽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내 속에서 어떤 변화가 오느냐가 중요한 것. 바로 그 '책을 통해 얻어지는 공감', 그것이 깊은 독서의 첫 번째 관건이다. 저자 혹은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여러 가지 추론을 하며 생각하게 된다고 매리언 울프 박사는 주장한다.

책을 읽는 순간 우리의 뇌는 변화한다. 전두엽이 활성화되며 사고력, 창의력, 기억력, 감정 조절 능력이 깊어진다. 이를 통해 쌓이는 배경지식, 많이 읽을수록 더 많은 배경지식이 쌓이고, 이는 다음 독서의 기반이 된다. 그리고 그 배경지식과 함께 뇌의 회로는 보다 정교해지고 복잡해지며 견고해진다.

예전에는 나이가 들면 머리가 굳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말하는 뇌과학자들은 없다. 하다못해 저글링만 해도 뇌의 회로는 변화한다. 노인이 돼서 굳는 게 아니라, 안 써서 굳는 것이다. 뇌를 활성화 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 그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독서'다.

난독의 시대, 어떻게 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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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견도 있다. 책을 사지 않을 뿐, 책을 읽지 않는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아예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레이아웃에 맞춰 디지털세대의 작가로 각광 받는 웹소설 작가 문화류씨는 자신들의 독자의 경우 한 달에 7, 8권의 웹소설을 소비한다며, 종이로 된 책을 안 살 뿐 자신들의 세대는 웹 소설 등으로 다른 독서의 세계를 열고 있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책은 좋고 디지털은 나쁘다’는 이분법 자체가 무의미한 시대다. 매리언 박사는 5살에서 10살 시절에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고, 11살에서 15살 무렵 책과 디지털의 세계를 접목해 나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라 권유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독서가 낯설어지는 시대, 과연 어떻게 다시 책과 친해질 수 있을까?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 씨는 친구가 되려면 시간이 걸리듯 책과 친해지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라고 권유한다. 일 년에 몇 권을 읽어치우려 하지 말고 한 권이라도 꼭꼭 씹어 먹듯이 읽으라고 권한다.

서민 기생충 박사의 주장은 파격적이다. 이미 어릴 적 반강제적인 독서교육으로 책을 멀리하게 된 시절, 차라리 어릴 적에 규제를 하여 책을 읽고픈 욕망을 극대화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송승훈 교사는 책을 읽으며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진다고 한다. 교과서를 보거나 EBS 문제집을 풀면서 고단하던 눈빛이 책을 읽고 거기서 재미를 느끼게 되면 변한다며, EBS 문제집을 적당히 보고 시간을 나눠 책도 좀 읽는 게 수능성적이 향상되는 지름길이라며 팁을 제시한다. 실제 박성경 학생의 경우, 처음엔 공부 시간을 빼서 책을 읽는 게 부정적이었지만 3개월 정도 꾹 참고 책을 읽다 보니 문제 푸는 시간이 늘어났다고 자신의 성공사례를 덧붙인다.

단, 송 교사는 서울대 권장도서목록 이런 건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좋아할 만한 책을 골라야 한다는 것. 독서를 한다면 대번에 50권을 사들이는 것도 피해야 할 일 중 하나란다. 일주일에 두 권씩 사들이면 어느 틈에 그 책들을 읽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강조한다.

같이 읽는 것도 한 방법이다. 보령의 '책읽는 마을', 대전의 '백북스' 등 전국에 여러 독서모임이 활동 중이다. 스마트폰을 보던 지하철의 시간을 활용하여 '지하철에서 책읽기 모임'도 있다.

홍천고등학교는 독해력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에게 독서 동아리를 장려했다. 친구랑 함께 책을 읽고 노는 시간이라고 시작한 아이들. 자신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 어느덧 전교생의 70%가 참여하는 83개의 독서 동아리가 활동 중이다. 심지어 고3이 되어서도 여전히 주말 오후에 함께 책 토론을 즐긴다. 동아리의 학생은 말한다. '책을 싫어하는 이는 없다. 단지 좋아하는 책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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