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의병과 같은 방법으로 나라를 구하긴 했느냐는 망언이 나왔다.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보수언론이 아니다. SBS 원일희 논설위원은 SBS CNBC 시사프로그램 ‘용감한 토크쇼 직설’ 클로징멘트를 통해 믿을 수 없는 발언을 했다.

원 논설위원은 “의병으로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백년 전 구한말을 복기하며 당시 해법 운운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때 그 방법으로 나라를 구하긴 했습니까”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의 의미는 나라가 위기에 빠져도 의병이나 독립군 따위는 하나마나라는 것이다. 그런 것일까? 우리나라는 긴 역사 속에 숱한 외침을 받아왔고, 그때마다 정규군이 아닌 민초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극복해왔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원일희의 직설] 반일 감정 자극이 해법은 아닙니다 (SBSCNBC 용감한 토크쇼 '직설' 방송화면 갈무리)

며칠 전 종영한 SBS 드라마 <녹두꽃>은 동학농민운동의 전 과정을 그렸다. 동학군은 일본군과 맞서 이길 수 없는 전투임을 잘 알면서도 싸우다 죽겠다는 의지를 불살랐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이 장면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무모한 자살행위로 보일 것이다. 그와 같은 패배주의는 식민사관의 잔재에 불과하다.

영화 <암살>의 명대사로 꼽히는 것이 있다. “친일파 하나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묻는 질문에 극중 안옥윤 역할의 배우는 “모르지.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는 대답을 했다. 우문현답이라고 해야 할 대화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명대사는 그 안옥윤이 한 “뭐라도 해야지”라는 말이다.

한국의 독립군은 일본군과 싸워 몰아내지 못했다. 대신 미·소의 군대가 한반도를 차지했다. 결과가 그랬다고 독립군의 모든 전투와 투쟁을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일본군 하나 사살하지 않고, 그럴 의도조차 없었던 비폭력 저항의 상징인 3·1운동도 무의미하고, 유관순 열사를 추앙하는 일도 불필요한 일이 된다.

원일희 논설위원은 “질 싸움에 끌려들어가는 것은 재앙”이라는 말도 했다. 이기지 못할 거면 맞아도 참고, 나라를 잃어도 가만있으라는 말과 다름없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하지 말란다고 중단할 것도 아니다. 촛불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의병이 그랬던 것처럼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 “질 싸움”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훼방인가.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회원들이 15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제품 판매중단 확대선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의 무역보복을 규탄하며 지난 5일 돌입했던 일본제품 판매중지 돌입 및 불매운동을 전국단위로 확대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이번 일본의 수출규제 아니 경제침공은 확실히 일본이 칼자루를 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 역시 만만치 않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의 피해가 더 클 것”이라고 경고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은 세계무역규모 5위의 나라이다. 일본의 공격에 우리 수출에 차질이 온다면 세계 경제 역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기업들이 일본 소재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구조적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협박과 공격에 지레 겁을 먹어 스스로 무릎을 꿇을 이유는 없다.

문재인 정부가 일본에 대해 같은 수출 및 수입규제로 맞서지 않고 국제 여론전을 펼치는 이유이다. 일본과 같은 방식의 대응은 일본의 의도에 말려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일본의 비열한 공격을 두고만 볼 수도 없다. 그래서 정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이고, 언론들이 불매운동에 대해 딴죽을 거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커뮤니티의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글의 제목은 “개싸움은 우리가 한다. 정부는 정공법으로 나가라”라는 것이다.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운 국민인가. 정부가 하고 싶어도 참을 수밖에 없는 대응을 알아서 해주는 국민이다. 어떤 선동도 계몽도 개입하지 않은 일본제품 불매운동 앞에 ‘감정적 반일감정’ 운운은 상대적으로 초라하기만 하다.

국가로서의 조선은 일본에 졌을지는 몰라도 조선인, 한국인은 일본에 지지 않았다. 지금 그 진 적 없는 싸움을 국민들이 하겠다는 것이다. 패배주의를 실용으로 둔갑시켜 의병을 폄하하고, 불매운동을 왜곡하는 말 따위에 흔들릴 시민들이 아니다. 우리는 3·1운동을 시작으로 4·19혁명, 5월 광주항쟁, 6·10민주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의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잘못을 참고 넘어가지 않는다. 일본은 가져본 적 없는 역사다. 그 역사가 시키는 것이 바로 일본제품 불매운동인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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